‘트랜스젠더 변호사’라는 이름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얼마 전 한 방송 인터뷰를 했다. 성별정정제도의 문제점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후 실제 방영된 프로그램을 봤을 때 자막으로 나에 대한 소개가 이렇게 나왔다. ‘박한희(트랜스젠더 변호사)’.

트랜스젠더 변호사, 나를 소개하는 말로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 방송에서 자막에 그렇게 소개돼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방송에서 인터뷰한 내용은 내가 트랜스젠더 당사자로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성별정정 사건을 대리해 온 변호사인, 이른바 전문가로서 이야기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전문가 인터뷰를 할 때 남자 변호사, 시스젠더 의사, 이성애자 교수, 이런 식으로 인터뷰이가 소개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왜 나를 소개하는 문구는 트랜스젠더 변호사일까.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오해가 없게 하자면, 이 글은 특정 언론사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여러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했을 때 상당히 높은 비율로 이렇게 내가 소개되곤 한다. 심지어 어느 방송에서는 ‘박한희(트랜스젠더)’ 이렇게만 자막이 나간 적도 있다. 그렇기에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다른 이들에게는 붙지 않는 트랜스젠더라는 명칭을 불필요하게 표시하는 관행들, 나아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 전반의 인식이다.

5월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날(IDAHOBIT)’이다. 이날은 1990년 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질병 분류에서 삭제한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날이다. 그리고 2019년 트랜스젠더 정체성 역시 국제질병분류상 정신장애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이렇게 세계보건기구가 성소수자를 질병목록에서 제외한 것은 과학적인 사실과 더불어 병리화에서 오는 여러 문제점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 그러한 비판 중 하나가 질병 분류로 인해 정신장애를 겪는 성소수자의 경험이 무시된다는 것이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우울과 불안 증세를 보일 때 그 원인은 학업 고민, 미래에 대한 걱정 등 다양할 것이지만, 만일 그 사람이 성소수자라면 그냥 성정체성에서 오는 갈등에 의한 것으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즉 성소수자 정신장애인은 성소수자라는 점 때문에 다르게 취급되고 그 경험과 진술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트랜스젠더 변호사라는 자막을 보면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도 바로 이런 것과 맞닿아 있다. 방송에서 이야기한 법적 성별정정제도의 문제는 현재의 엄격한 성별정정 요건과 절차가 법 앞에 인정받을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며, 이는 내가 이야기하든 아니면 다른 비트랜스젠더 변호사가 이야기하든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에 트랜스젠더 변호사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이는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로 취급된다. 어쩌면 당사자라는 이유로 더 신빙성이 높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당사자이기에 편향된 시각이 있다고 여길 여지도 있다. 어느 쪽이든 비트랜스젠더를 표준으로 보면서 그에 벗어난 다른 존재로 취급하는 건 마찬가지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2020년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날’을 기념해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다’는 문구로 지하철 광고를 진행했다. 이렇게 혐오와 차별에 맞서 ‘성소수자는 일상 속에 있다’를 외치는 것은 단지 당사자가 옆에 있으니 혐오하지 말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회사원, 교사, 학생, 군인, 공무원 등 성소수자라는 하나의 범주로만 묶일 수 없는 다양한 배경과 생각, 경험들을 지닌 사람들이 일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소수자도 비성소수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고민과 경험을 하며 일상을 살고 있다는 것, 성소수자로서만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는 것, 따라서 성소수자를 표준에서 벗어난 특별한 무언가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성소수자는 일상 속에 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싶은 의미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언론사들에 부탁한다. 자막 소개 문구를 넣기 전에 한 번 더 고민하고 물어봐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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