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처럼 자유롭게

서정홍 시인

도시에서 살 때는 내가 잘하는 게 무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하면 신바람이 나는지,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았다. 어린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바쁘게만 살았다.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잔업에 특근까지 죽자 사자 일해서 집주인에게 월세를 주고 주택부금, 정기적금, 국민연금, 건강보험, 갖가지 세금 한 푼 떼어먹지 않고 부지런히 살았다. 도시에선 가만히 나를 돌아보거나 외로울 틈조차 없었다. 가끔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들 만큼 바쁘게 살아도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더구나 상사들한테 밉보여 일터를 잃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약삭빠르게 자리 지키며 불안한 마음까지 끌어안고 살았으니, 어찌 자유로울 수 있으랴.

서정홍 시인

서정홍 시인

새처럼 훨훨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가진 게 없어도 하루하루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도시 삶을 시원하게 정리하고 농부가 되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드디어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농부가 된 것이다. 마흔일곱,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였다. 산밭에 하얀 감자 꽃이 필 때마다 그때가 떠오른다.

16년 전이다. 아내와 자식들을 도시에 두고 합천 황매산 자락 나무실 마을에 혼자 들어와 다 쓰러져 가는 빈집을 빌려 군불을 때고 잠을 자던 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3년 뒤에 아내도 스스로 도시 삶을 정리하고 농부의 아내가 아닌, 농부가 되었다.) 그리고 남의 산밭을 빌려 삽과 괭이로 감자밭 이랑을 만들고 씨감자를 심고 산길을 내려오던 날, 그날도 잊을 수가 없다. ‘아직 3월 봄바람이 찬데 씨감자는 춥지는 않을까? 캄캄한 땅속에서 식구들과 떨어져 어떤 생각을 할까? 꽃을 피워 주렁주렁 식구(열매)들을 거느릴 생각을 할까? 유월이면 내 손으로 농사지은 감자가 도시에 사는 식구들 입에 들어갈 수 있겠지.’ 수확도 하기 전에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마음 설렜는지 모른다. 더구나 2005년 2월2일 국가에서 농부로 인정하는 ‘농지원부’가 나오던 날은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내 입에서 바쁘다는 말은 하지 말자. 그리고 바쁘게 살지 말자. 천천히 뒤도 돌아보고 옆도 돌아보며 살아가자.’

2021년 유월이다. 농부들은 한 해 가운데 가장 바쁜 농사철이다. 그런데 나는 같은 말이지만, 한 해 가운데 가장 일이 많은 농사철이라 한다. 바쁘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을 했으니까 말이다. 바쁘게 살면 나를 돌아볼 틈도 없는데 어찌 이웃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

오늘도 아내와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소금으로 이를 닦고, 물 한 잔 마시고, 가볍게 몸을 풀고 산밭으로 갔다. 여기저기 하얀 감자 꽃이 피었다. 16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내 손으로 심은 씨감자가 꽃을 피웠다. 올해도 씨감자는 우리 식구들을 먹여 살리라고, 아니 다른 식구들도 먹여 살리라고 3월 꽃샘추위 찬바람을 견디며 캄캄한 땅속에서 홀로 외로움을 견디며 주렁주렁 열매를 달았을 것이다.

농약(살충제)과 화학비료 한 줌 뿌리지 않고 비닐조차 쓰지 않고 농사지은 감자는, 지렁이와 두더지와 굼벵이를 벗 삼아 오늘도 쑥쑥 자라고 있을 것이다. 고맙다, 고맙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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