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공정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그동안 억눌려 있던 불공정한 자본주의와 불평등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지난 4월 미국의 조 바이든 정부는 불공정을 줄이는 방법으로 부자 증세, 법인세와 자본이득세 인상을 제안했다. 유럽연합(EU)도 뜻을 같이해 전례 없는 미국과 EU의 공평과세 공조가 이뤄지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이 조세회피처를 이용해 납세 의무를 다하지 않고, 국가 간 자본 유치 경쟁이 공평과세를 제약하는 현실을 타개하려는 노력이다. 물론 바이든의 증세 제안에 대한 미국 보수진영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한국에서도 공정논쟁이 크게 주목받고 있다. 공정이 사회적 관심사가 된 것 자체는 고무적인 일이다. 적어도 글로벌 사회의 큰 흐름을 따라가는 것일 뿐 아니라, 공정 문제가 한국경제의 아킬레스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한국의 공정논쟁이 핵심을 한참 빗나가 있다는 사실이다. 능력주의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능력주의는 형식에 불과하고 공정의 답이 아니다. 공허한 논쟁은 거두고 알맹이 있는 논쟁으로 이어지기 바란다.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는 6세기 수나라에서 처음 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과 친·인척들을 관료로 등용하는 정실인사로 국가 권력을 세습하는 부패와 불공정이 극심한 사회에서 과거제가 일으킨 변화는 컸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과거제는 고려시대에 도입되어 조선 말까지 지속됐다. 정조 24년에는, 당시 서울 인구 19만명에 가까운, 무려 14만명의 응시생이 몰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과거는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 속에서도 시행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중요한 등용문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불공정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이런 과거제만으로도 불공정의 개선이 있었을 것이다. 신분 차별 없이 관직에 지원할 기회가 조금이나마 주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열린 기회의 창은 좁았고 세습권력, 정실인사와 부패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의 공정은 이런 과거제도와 능력주의의 형식적 기회평등을 넘어 실질적 기회평등을 필요로 한다. 집안 배경, 성과 인종 등 ‘사회적 복권’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경쟁할 수 있는가? 협력의 성과가 공정하게 배분되는가? 개인에게 닥칠 ‘가혹한 불운’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가? 이런 문제들에 답할 수 있어야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공정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과거제도와 같은 능력주의는 앞서 말했던 공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자유방임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효율적이라고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공정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이나 북유럽 복지국가 자본주의에 한참 뒤처졌다고 생각한다.

바이든은 부자증세를 통해 취약계층 아동의 건강, 의료, 교육에 투자하겠다고 했다. 저소득층 아동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건강하게 교육받아야 부잣집 자녀들과의 출발선의 차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실질적 기회평등을 위한 제안이다.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노동자들이 실업이라는 가혹한 불운의 위협에 노출됐다. 각국의 사회보험과 재난지원이 이런 실업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고 그 보호의 수준은 국가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사회보험이 취약하고 고용보험의 사각지대가 갈수록 커지는 우리 노동시장은 공정의 관점에서 살펴봐야 할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한 청년이 있다. 이 청년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열에 일곱은 명문대에 진학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명문대 졸업이 좋은 일자리를 잡는 데 중요한 능력이라면, 이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에 지원할 수 있는 형식적 기회는 있지만, 취업할 수 있는 실질적 기회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명문대 졸업이란 능력을 획득할 기회가 가난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교육과 취업에서의 실질적 기회평등이 무너진 지 오래다.

우리 노동시장은 소수의 좋은 일자리와 다수의 나쁜 일자리로 나뉜 가혹한 정글이다. 지난주에도 한 택배기사가 잠을 자던 중 뇌출혈로 의식불명에 빠진 사고가 발생했다. 주 6일 근무에 하루 2시간만 자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장시간 노동의 대가는 보험료, 기름값 등 비용을 다 빼고 나면 최저임금 수준에 불과하다.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노동자가 직면하는 현실은 가혹하다. 원청과 외주업체가 협력하지만, 외주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건 원청 노동자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과 생명을 위협하는 작업이다. 우리 경제의 분배정의도 망가진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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