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빵밖에 없었어

이랑|뮤지션·작가
빵을 먹었어

빵을 먹고 빵을 남겼어

남긴 빵을 그려보았어

그린 빵을 보고 앉아서

이것밖에 없었어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좋다고 말할 만한 것이

이 빵밖에 없어서

이 빵밖에 없어서



유난히 시끄러웠던

싸움이 잦은 길을 지나

몇 개인가의 빵집을 지나다가

그중 여섯 번째 집에서

빵을 사고 빵을 골랐어

사온 빵을 꺼내보았어

빵은 그대로 거기에 있었어


이랑|뮤지션·작가

이랑|뮤지션·작가

나는 16년 차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로 사계절 내내 콧물을 흘리고 재채기를 한다. 한창 사스가 유행일 때도 그랬지만 요즘같이 전염병에 예민한 시기엔 밖에서 재채기가 나올 때마다 저절로 눈치를 보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재채기를 맘대로 제어할 수도 없는데,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피해가면 내 자신이 바이러스가 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동할 때는 되도록이면 자전거를 탄다. 재채기 소리에 흠칫 놀라는 행인들 시야에서 그나마 빨리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재채기 덕분에(?)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실로 출근하기 전 60번 정도 더 재채기를 했다. 눈이 간지러워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작업실에 가는 길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은 공사 중인 카페들이다. 카페 옆 카페, 카페 앞 카페. 내가 살고 있는 망원동엔 이미 카페가 차고 넘치지만 그럼에도 또 새로운 카페가 공사 중이다. 엄청난 수의 카페들을 지나다 그중 빵집에 한 번 들러 샌드위치를 사고, 카페에 한 번 들러 커피를 산다. 좋아하던 백반집과 쌈밥집은 몇 년 사이 다 사라져버렸다.

10분 정도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오늘의 운세를 점쳐본다. 매일 다니는 똑같은 길이지만 어떤 날은 공기처럼 바람처럼 유연하게 행인들 사이를 지나치고, 어떤 날은 몇 번이나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행인들과 부딪힐 뻔한다. 그런 날엔 유난히 흐트러진 행인들이 많은 날인지 아니면 내 주의력이 흐트러져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오늘이 대체휴일일 수도, 공휴일일 수도 있지만 평일과 주말이 크게 다르지 않은 프리랜서인 나는 거리를 걷는 행인들의 수와 분위기를 통해 오늘이 어떤 날인지 추측하곤 한다. 반대로 바람처럼 유연하게 달리는 날엔 ‘나는 이 도시에서 어떤 요소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집에서 나와 복잡하고 번잡한 거리의 그 어떤 요소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무사히 작업실에 도착하고 나면,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는 사람이 저기서 여기까지 이동하는 동안 도시는 그대로 번잡하고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으니 ‘나’라는 요소는 이 도시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는지 항상 궁금했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사물들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좀 전에 빵집에서 사온 빵이 내가 이동하는 사이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빵 봉투를 열면 빵은 언제나 그 안에 있었다. 어째서 그사이에 사라지지 않고 여기 그대로 있는 걸까. 이 빵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을까.

3집 앨범에 수록 예정인 ‘빵을 먹었어’라는 곡은 화가인 친구가 그린 빵 그림을 보고 만들기 시작했다. 눈 덮인 아이슬란드에 머물며 풍경화를 그리던 친구가 서울로 돌아와 돌연 빵을 잔뜩 그리고 있기에 ‘왜 요즘엔 빵만 그리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혹시 나처럼 먹고 남긴 빵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신기해 빵을 그리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는 밖에 나가기 춥기도 하고,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예쁜 것이라 빵을 그렸다고 대답했다. 생각보다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예쁜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깊게 와닿았다. 오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람처럼 달려 작업실에 도착해, 그대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을 붙잡고 거울을 보면서 생각했다.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이 빵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오랫동안 겪고 있는 우울감이 가장 무겁게 다가올 때는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잠식될 때였다. “내가 여기 있다!”고 창문을 열고 외치고 싶은 날도 있었다. 사라지고 싶은 마음을 붙잡고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 빵집에서 작업실 책상까지 그대로 따라온 빵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 너도 사라지지 않았으니 나도 오늘 사라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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