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대로 할래요

이호준 정책사회부 차장

“정책의 취지를 살려서 잘 추진하겠다.” 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때 정부가 자주 꺼내 쓰는 말이다. 선의를 담아 해석하면 ‘공익을 위해 설계한 정책이 올바로 작동하도록’ 정도가 되겠고, 다소 심술궂게 표현하면 ‘하던 대로 할래요’ 정도가 되겠다.

이호준 정책사회부 차장

이호준 정책사회부 차장

정책 하나를 설계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전문가가 등장해 훈수를 둔다. 무슨무슨 위원회가 꾸려지고 공청회와 사무관, 서기관, 과장, 국장, 실장에 차관, 장관, 국회까지 보고서가 끝없이 쌓인다. 여기에 10년 계획, 국정과제, 대선공약, VIP(대통령) 보고자료 같은 대목에 밑줄이 쫙 그어지고 나면 정책 하나가 정말 어렵게, 어렵게 만들어진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현실과 동떨어져 진짜로 정책의 취지 하나만 남는 일도 부지기수라는 점이다. ‘집은 투기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처럼, 쉬운 설명으로는 반박하기 힘든 선한 말에 기대어 뚝딱 만들어진 정책들이 대표적이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똑부러지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대통령부터 유력 정치인들까지, 고개 숙인 이들 모두 뭔가 잘못됐다는 건 분명히 안다. 허겁지겁 종부세 부과 기준을 완화하고, 재건축 거주의무 같은 것들이 없었던 일처럼 사라지는 촌극이 생중계된다. 미친 집값, 미친 전세로 분노하는 실수요자 앞에서 부동산 정책의 취지는 영 흰소리가 돼버린 셈이다.

비행기 이륙을 막고, 주식시장 개장까지 미루는 대한민국 비공식 서열 1위 행사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석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올해는 특히 문·이과 통합 형태로 처음 치러진다. 여러 가지가 달라진 가운데 국어와 수학에 딸린 선택과목을 어떻게 고르느냐에 당락이 크게 좌우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과목을 신청할지 수험생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선택일 테다.

불편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시험만능의 폐해와 서열화 파괴를 목놓아 외치고 있지만 여전히 1점에 당락이 결정되는 세상을 수험생들은 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여전히 수능을 입시를 넘어 인생을 결정하는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정부가 수험생들의 당락에 결정적인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려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6월 수능 모의평가 선택과목 성적 분석 이야기다. 선택과목별 점수를 알려주면 수험생들이 혼란스러워하고 “비교육적인 방식”, 이를테면 눈치작전으로 경쟁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게 교육부의 설명이다. 입시지도를 하는 현장의 선생님들조차 공개를 원했지만 알려주지 않기로 결정했단다. ‘깜깜이’ 수능 우려에 “문·이과 통합이라는 정책 취지에 맞게” “정책 취지가 훼손되지 않게”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물론 9월 모의평가 때도 안 알려주겠다고 한다.

정부가 공개를 거부한 선택과목별 점수 편차는 입시학원에서 나왔다. 교육부가 공개를 거부한 당일 오후였다. 입시학원은 이 정보를 산출하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입시학원이 아니었어도 결과는 결국 어디에선가 나왔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입시학원에 안테나를 세운 학생들은 이제 진짜 “비교육적인 방식”으로 다른 학생들에 비교 우위를 점하게 됐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정책의 실수요자는 누구일까? 11월 시험장에 입실할 수험생과 학생, 학교일까. 아니면 저 위에 계신 ‘정책의 취지’ 또 그분일까.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