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풍경

[송두율 칼럼]배신의 풍경

대선을 앞둔 정국 때문인지 여야를 막론하고 후보의 과거 행적과 오늘의 행동거지를 둘러싼 설전이나 비방이 거칠어지는 것 같다. 집권당의 후보를 두고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에 가담했다는 비난이나, 야권의 후보를 두고 불과 얼마 전까지 현 정부의 고위관직을 지낸 경력을 문제로 삼아 심심치 않게 배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신의를 쉽게 저버리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느냐는 윤리적인 전제를 깔고 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배신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인간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혹독하다.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는 은전 30냥에 예수를 배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다는 배신의 화신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하늘나라의 왕인 예수를 배신한 유다와 함께 지상의 제왕인 카이사르를 암살한 부르투스와 롱기누스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얼음 속에 고통스럽게 갇혀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배신의 대가가 그만큼 무섭다는 것이다.

이런 배신자 유다를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의 단편집 <픽션들> 안에 수록된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1944)의 주인공인 스웨덴 신학자 루네베리는 유다가 예수의 거울이라고 주장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인간으로 낮추었으면 죄를 범할 수도 있고 타락할 수도 있는데 바로 이러한 운명을 선택한 제자가 유다라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 속에서 독일의 유명한 수사학자 발터 옌스(1923~2013)는 그의 마지막 소설 <유다의 재판>(1975)에서 “유다 없이는 십자가도 없고, 십자가 없이는 구세의 계획도 없고, 이 사람 없이는 교회도 없고, 계승자 없이는 계승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언론과 검찰개혁 거창해 보여도
‘이석기 사건’ 복기하면 의미심장
과거의 정치적 야합 타파하는 게
개혁을 위한 바른길이기에
이석기는 하루라도 빨리 석방돼야

금전에 눈이 어두워 예수를 유대인에게 팔아넘겼다는 유다는 중세 이후 오랫동안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어 ‘유다 같은 녀석’이라는 욕설까지 생겼다. 그러나 유다를 위한 이러한 적극적인 변호는 우리가 모두 결국 유다라는 자기 고백이야말로 기독교의 진정한 신앙생활의 출발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크고 작은 배신행위를 경험하면서 인간세계의 어두운 구석을 보며 실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복수심의 유혹에도 빠진다. 특히 적과 아를 구분하는 치열한 정치적 투쟁에서 흔히 등장하는 ‘누가 우리를 배신했는가’라는 질문은 응징이나 복수라는 뜻을 이미 그 속에 담고 있다.

배신과 복수가 서로 엉킨 정치적인 사건을 생각할 때 나는 먼저 두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1944년 7월20일 총통지휘본부에서 일어난 히틀러 암살 기도와 실패, 그리고 1979년 10월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벌어진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이다. 두 사건의 주동자는 모두 독재자의 최측근에 속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혼란과 절망에 빠진 독일을 구원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히틀러의 집권에 아주 긍정적이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은 무모한 전쟁의 참혹상을 전선에서 직접 경험하면서 나치 체제에 비판적으로 되었다. “이제 무엇인가를 해야 할 시간이다.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자는 그가 독일 역사에 배신자로 기록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으면 그는 스스로가 양심을 배반하게 된다. (…) 내가 만약 이 무의미한 인간 희생을 막지 못한다면 전사자들의 부인과 자식을 대할 면목이 없다”고 슈타우펜베르크는 거사 직전의 심정을 남겼다. 거사 실패 후 그는 다음날 총살로 즉결처분되었다.

유신정권의 막강한 조직인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지만 ‘부마항쟁’을 지켜보고 유신체제가 더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김재규 부장은 거사를 시작했지만 신군부 세력에 의해 그의 기도는 곧 좌절되었다.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유신의 핵심이었던 박 대통령의 희생은 불가피했고, 3심 재판에서는 비록 졌지만 4심인 역사의 법정에서는 이길 것이라는 최후진술을 남긴 김재규는 1980년 5월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면 두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떤가. 종전 후 서독에서 1951년 처음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7년 전에 있었던 히틀러 암살 기도에 긍정적, 부정적 평가 그리고 모른다는 응답이 각각 3분의 1 정도였다. 이 사건에 대한 평가가 아직 정리된 상태가 아니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70년이 지난 2014년의 조사에 의하면 46%는 매우 긍정적, 33%는 그저 그렇다는 소극적인 평가를 했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4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주인공인 김재규에 대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나는 알지 못한다. 물론 국내의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비난과 추앙의 정도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고 그의 삶에 대한 평전이 나올 정도니 분위기가 어느 정도 변했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배신의 풍경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다. 독일의 여류 언론인 마르그레트 보베리(1900~1975)는 방대한 저작 <20세기의 배신>(1956~1960)에서 “배신은 우리 삶에서 일상적인 개념이 되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배신의 내용은 변한다. 어제는 배신자로 교수형을 당한 사람이 오늘은 영웅과 순교자로 추앙받는다.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배신은 항상 변하는 그림자처럼 우리와 함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며칠 전 해변을 산책하다가 들여다본 스마트폰에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가 85세로 리스본에서 사망했다는 뉴스가 떴다. 얼마 만에 들어본 그의 이름인가. 1974년 4월25일, 살라자르의 오랜 독재체제를 종식한 ‘카네이션 혁명’의 핵심 지도자였던 그는 군부 내 진보세력의 상징으로서 ‘포르투갈의 체 게바라’로도 불렸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은 안투니우 라말류 이아네스에게 패한 뒤 군부 내의 극좌세력과 연결해서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혐의로 수감되었으나 후에 사면되었다. 혁명이 추구했던 이상을 배신한 실망스러운 현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혁명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씁쓸한 소회가 섞인 그의 말이 생각났다.

2007년 발표된 ‘위대한 포르투갈인’의 맨 첫 자리에 독재체제의 상징 그 자체였던 살라자르가 올랐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68번째에 있었다. 역사 속에 흐르는 어떤 배신의 역설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으면서 ‘촛불혁명’의 운명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한편에서는 현 정부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는데 반대편에서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정권이라고까지 증오한다. 이 극단적인 두 평가 사이에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는가’라는 자괴감 섞인 실망과 고민이 놓여 있다.

특히 개혁정책을 현장에서 지휘할 장관을 포함한 고위직 인사에 대한 검증이 부실하게 이루어진 것의 결과로 임명 전 낙마하는 사태가 자주 발생해 난감하게 느껴지고, ‘적폐청산’이라는 구호는 요란한데 구체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라는 이야기를 멀리서도 자주 듣게 된다. 현재 야권의 유력한 대선 주자 세 명이 모두 현 정부 스스로가 키운 셈이 아니냐는 반문을 들을 때면 배신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이 같은 사태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언론이나 검찰 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실 너무 거창하게 들린다. 이 문제를 그러나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복기해보면 그러한 개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곧 드러난다. 박근혜 정부 아래서 국정원과 검찰, 그리고 언론이 총동원되어 벌인 종북 공세 속에서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이석기 통진당 전 의원은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금 8년째 복역 중이다. 현 정부가 출범한 이래 국내외에서 줄곧 그의 석방을 탄원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이제 형기를 거의 다 마쳤으니 조금 있다가 만기출소하면 됐지, 불필요한 이념논쟁을 다시 불러오는 우를 범하지 말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에 있었던 부정한 정치적 야합을 먼저 타파하는 것이 개혁을 위한 바른길이기에 그는 하루라도 빨리 석방되어야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 8·15가 그래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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