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용 어린이가 자꾸 움직이면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24시간 내 옆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것, 아무리 밤이 깊어도 부르면 즉시 달려오는 것, 아침에는 침대, 저녁에는 비행기가 되는 걱정의 신”, 이것은 무엇일까? 권정민의 그림책 <엄마도감>을 보면 해답은 엄마다. 흔히 육아일기를 읽어온 양육자들에게는 아기가 아기의 관점에서 양육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해 도감을 만든다는 발상이란 반전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권정민 작가는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 비유적으로 떠오르는 독특한 작업을 펼쳐왔다. 상대성이론은 물체의 운동에서 서로 다른 관측자들과 관측의 양상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설명한다. 관측자의 운동에 따라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측정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은 ‘지침서’ ‘사전’ ‘도감’처럼 객관적 서술을 특징으로 하는데 책 속의 관측자로는 동물, 식물, 어린이가 등장한다. 덕분에 우리는 멧돼지의 운동속도를 기준으로 청계천의 유속을 바라보거나 인간이 목줄을 한 상태에서 강아지 주인의 속도에 이끌려가는 상대적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의 그림책 <지혜로운 멧돼지를 위한 지침서>에서 주인공 멧돼지가 도심 청계천까지 내려온 이유는 살던 산에 굴착기가 들어오면서 현란한 분양권 거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그림사전>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자리를 바꾸게 하고 동물의 시선으로 사전을 다시 쓰면서 누군가의 여유가 누군가에게는 고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시공간에 대한 믿음 전체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최근 권정민 작가의 방식으로 시공간을 관측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뉴스들이 여럿 있었다. 예를 들자면 어린이의 등굣길은 위험하므로 등굣길 자체를 어린이의 삶에서 긴축 혹은 삭제하는 게 어떠냐는 일부의 정책제안 같은 것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학교 앞 도로에서는 차량의 시속을 30㎞ 이내로 줄여야 하는데, 등굣길을 없애버리면 운전자가 단속이나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공간을 바라보는 시야도 남다르다. 학교 위에 집짓기를 제안한다. 초과이익을 다투지 않고도 공급 폭탄을 투척할 수 있는 주학근접의 황금 택지로서 학교부지가 재조명되는 것이다. 요즘 초등학교를 품기만 해도 집값이 오른다는데 초등학교를 깔고 앉은 땅이라면 얼마나 인기가 드높을 것인가. 아이들은 길에 나올 일이 드물어질 것이니 어른들 골칫거리가 줄어든다. 역시 세상에는 앞서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등굣길이란 무엇인가? 어린이 관측자를 모셔서 묻고 다시 정의를 내려보자. 학교 가는 길은 과속 차량을 만날까봐 두려운 길이지만 안전한 통학로만 확보된다면 즐거운 길이다. 길고양이가 화단 안쪽에 밤새 새끼를 낳은 안타까운 길이며 개미들이 바닥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옮기는 신기한 길이다. 멀리 무지개라도 떴다면 친구랑 손잡고 하늘이 잘 보이는 모퉁이에서 한참 서 있게 되는 소중한 길이다. 존 버닝햄은 <지각대장 존>이라는 그림책에서 등교하는 어린이의 시공간 경험을 다룬 바 있다. 주인공 존은 학교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걷는다. 그러나 가다보면 덤불에서, 하수구에서는 재미있는 일들이 날마다 일어난다. 교장은 “(학교에) 갇혀봐야 정신을 차리겠냐?”고 호통치면서 400번, 500번 지각 반성문을 쓰라고 말한다. 이 그림책의 원제는 ‘존, 항상 늦는 아이’인데 여기서 ‘항상’이라는 말과 ‘늦는’이라는 말은 어른 관측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약자의 삶은 종종 거래의 대상이 된다. 이걸 줄 테니 저걸 달라는 이들에게 시달리기 쉽다. 어린이는 약자이면서 투표권도 없다. 그러나 어린이를 두고 거래하지 말기 바란다. 어린이는 어른의 기분을 달래기 위한 관상용 식물이 아니며 장기 투자 펀드도, 인간 보험도 아니다. 그리고 학교는 그들에게 남겨진 거의 마지막으로 안전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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