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불안은 사소하지 않다

김민아 논설실장

① 여자는 20개월이었다. 양아버지에게 맞아 숨졌다. 생전에 성폭행 피해도 입었다. 가해자는 기소돼 재판받고 있다.

② 여자는 25세였다. 첫 월급을 받은 다음날,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했다. 남자는 119 신고 과정에서 거짓말을 했다. 법원은 남자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여자는 3주간 뇌사 상태로 투병하다 사망했다.

③ 두 여자는 각각 40대, 50대로만 알려졌다. 성범죄 전과자에게 살해당했다. 남자는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했다. 도주하기 전 한 여자를, 도주 과정에서 또 다른 여자를 죽였다. 경찰과 보호관찰소에서 수차례 그의 집을 찾아갔지만, 수색은 하지 않았다. 집 안에는 첫 번째 피해자의 시신이 있었다.

④ 여자는 77세였다. 손자들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졌다. 가해자 2명은 체포됐다.

김민아 논설실장

김민아 논설실장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초청받고, 경제규모는 세계 10위권에 들며, 지구촌이 사랑하는 스타와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390명을 군용기를 급파해 데려올 만큼 인권감수성도 갖췄다. 1980년대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은 마침내 실현되고 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그런데 ‘저마다’에 빠진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여자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건은 모두 최근 사나흘 사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피해자 연령은 20개월부터 77세까지다.

모든 범죄를 막을 수는 없다. 모든 죽음을 막을 수도 없다. 그러나 어떤 범죄, 어떤 죽음은 막을 수 있다.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가 존재한다고 했다. 전자발찌 훼손 범죄는 흔하디흔했다. 그때마다 법무부는 보완책을 내놓았다. 전자발찌의 견고성을 강화하겠다, 관리감독 인력을 충원하겠다…. 유의미한 변화는 없었다. 고층빌딩에 금이 가고 있는데, 때우는 일조차 제대로 안 한 거다. 결국 빌딩은 무너져 내렸다. 두 여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번 사건(사건 ③)으로만 좁혀봐도, 최소한 두 번째 살인은 막을 여지가 있었다. 가해자 강모씨는 지난 26일 오후 9시30분~10시 집에서 첫 피해자를 살해했다. 2시간여 후인 27일 0시14분 그는 집을 나섰다. 강씨는 야간외출이 제한된다. 위반 경보가 발령돼 보호관찰소에서 출동했다. 하지만 0시34분쯤 강씨가 귀가했다. 보호관찰소 범죄예방팀은 ‘나중에 불러 조사하겠다’고 한 뒤 돌아갔다. 야간 외출제한 위반에 대한 제재만 즉시 가했더라도 추가 피해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강씨는 27일 오후 5시30분쯤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했다. 이후 두 번째 피해자를 살해했다. 경찰은 검거하지 못했다. 강씨가 자수하지 않았다면, 상상하기도 싫지만 세 번째 피해자가 나왔을지 모른다.

모든 범죄자는 응징돼야 한다. 응징의 방법과 수위를 정하는 기준은 법률이다. 주체는 법관이다. 법치국가에서 마땅히 존중돼야 할 원칙이다. 이 원칙에 회의가 드는 경우가 있다. 서울서부지법은 25세 여성을 폭행한 남성(사건 ②)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사회적 유대관계가 분명해 도주 우려가 없다”고 밝혔다. 영장 기각 당시 피해 여성은 사망 전이었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해도 기각 사유는 납득하기 어렵다. 나무통을 집으로 삼았다는 디오게네스가 아닌 한, 사회적 유대관계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무부·검찰은 강력범죄 가운데서도 살인·강도·성폭력·방화를 흉악범죄로 분류한다. 법무연수원이 펴낸 ‘2020 범죄백서’를 보면, 2010~2019년 4대 흉악범죄 피해자는 여성이 남성보다 8배가량 많았다. 여성 피해자 비율은 2010년 82.9%, 2013년 88.2%, 2017년 89.6%, 2019년 89.2%를 기록했다.

전자발찌 착용자가 30배 넘게 급증하는 동안 이를 관리하는 감독자는 6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 데이트폭력 방지법안은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젠더폭력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여전히 기계적인 경우가 많다. 여성의 불안이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기 때문 아닐까. 안전에 대한 갈망을 유난스러운 예민함 정도로 간주해서는 아닐까. 정부와 국회가 ‘부동산 세금’을 깎아주네 마네 하며 쏟아붓는 관심의 10분의 1만 여성 안전에 돌린다면 상황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법무부는 두 여성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이튿날에도 “전자장치 견고성 개선 등 훼손 방지 대책 마련”만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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