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 나올 수 있을까

부희령 작가

해와 달이 비추는 곳 모두를 정복한 여장부 장광제는 천자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 태산에 올라 흰 소, 흰 양, 흰 돼지로 번제를 지내 술과 함께 바친다. 오수연의 소설 ‘솥’의 첫머리를 읽어내려가면서, 여러 해 전 네팔에서 올랐던 포카라 근교의 어느 산을 떠올렸다. 제물들의 흰색 이미지에서 병풍처럼 펼쳐진 안나푸르나의 희고 각진 연봉이 연상되었기 때문일까.

부희령 작가

부희령 작가

하룻밤 머문 산장은 한때 쿠마리였던 여성들이 꾸려가는 곳이었다. 네팔의 힌두교에는 초경 전의 어린 여자아이를 뽑아 상징적 여신으로 숭배하는 제도가 있다. 여신 쿠마리 역할이 끝난 이들은 일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는 살 수 없다. 그들은 먼 옛날 성자들이 은거하던 자리로 알려진 산장에서 여행자들에게 차와 밥을 만들어주고, 텃밭에 푸성귀를 가꾸고, 아침 햇살에 흰 봉우리들이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눅눅한 담요를 널어 말리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은퇴한 여신들은 소설 속 여제처럼 당당하고 강하다.

‘가운데에 물고기 꼬리 모양으로 솟은 마차푸차레가 안나푸르나의 아들이다. 봐라, 어머니가 아들을 무릎 위에 앉힌 모습이지 않은가?’ 산장의 오랜 식객인 서양 노인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너희 나라에서도 신성한 어머니와 아들의 형상을 이룬 산들을 보았다.’ 노인은 어디에서나 어머니와 아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 같았다.

쿠마리들의 산장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찾아본다. 이 세상 풍경이 아닌 듯 보이는 은빛 봉우리들, 정상을 향해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들, 산비탈에 좁고 길게 일군 밭의 모습은 여전했다. 여전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이제 그곳은 산악자전거로 혹은 모터사이클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명소가 된 것처럼 보였다. 오직 쿠마리들의 산장밖에 없던 곳에 소박한 규모의 리조트도 세워졌다. 잠시 명치끝이 싸해진다.

물론 긴요한 용건도 없이, 죽기 전에 히말라야를 직접 보고 싶다는 허술한 욕망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간 내가 서늘한 슬픔 같은 것을 느낄 자격은 없다. 탄소발자국을 깊이 찍고, 과도하게 보정한 사진을 SNS에 올려 산에 대한 환상을 널리 퍼뜨렸다. 그렇다면 만년설이 맥없이 녹아내려 눈사태와 홍수가 빈발해진 히말라야의 변화에 나 또한 일조한 셈이다. 고백하건대 당시에는 한 줌의 회의도 자책도 없었다. 살아오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 벅찬 순간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그 자리에 서게 될 기회가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떠날 수 있을까?

‘내 어찌 거기까지 가겠는가. 되돌아 나올 수 있을까.’ 천명의 상징인 보배로운 솥을 얻은 뒤, 장광제는 종종 중얼거린다. 불멸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채 정사도 팽개치고, 통가죽으로 형상화한 ‘땅’과 ‘물’과 ‘하늘’을 차례로 도살하여 자기 자신에게 바친다. 새로운 역법을 선포하여 시간을 일곱 번이나 되돌린다. 원하는 모든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 사랑하는 모든 것을 곁에 두고자 하는 욕망은 아마도 자아가 소멸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될 테다. 제국은 붕괴했고, 여제는 용을 타고 승천했다. 지상으로 다시 돌아오지는 못했다.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