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광주 노무현’과 2021년 ‘충청 이재명’

이기수 논설위원

대선의 첫 투표함이 까졌다. 여론조사 면접원이 늘 응답자를 채우는 속도가 더뎌 고생하고, 선거 출구조사원에게 “될 사람 찍었겠쥬~”라며 속마음을 잘 안 비치고 지나간다는 충청도였다. 중원의 요충지이고, 지역 맹주도 없고, 당원들의 생각은 어떨지 몰라 더 주목했다. 그리고 모두 알 듯이 한쪽으로 기운 투표함이 열렸고, 그 숫자는 더불어민주당 경선의 추와 물줄기를 갈랐다.

이기수 논설위원

이기수 논설위원

이재명(경기지사)의 압승이었다. 지난 4일 대전·충남에서 54.8% 득표율이 발표된 직후 대전에 사는 고교 동창의 전화를 받았다. “저 정도일 줄은….” 민주당 권리당원이라는 그도 “이재명을 찍었지만 55%는 짐작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기야 5일 아침 TV에 나온 이준석(국민의힘 대표)도 그 숫자엔 놀랐다고 했다. 이유는 같다. 당 조직을 받치는 대의원과 당비를 내는 권리당원, 이른바 ‘당심’의 선택이 처음부터 확 쏠린 걸 보는 의아함이었다. 이 흐름은 5일 이재명이 54.5%를 찍은 세종·충북에서도 이어졌다. 앞서가는 여론조사와 당심이 공명(共鳴)하길 바란 이재명의 꿈이 충청에서 먼저 영글었다.

야당도 지켜봤을 것이다. 충청 열전에서는 두 가지가 겉돌았다. 현역 국회의원의 위력과 네거티브의 효과다. 이낙연이 충청 반전을 꾀한 교두보는 총리·대표 시절부터 쌓아온 조직이었다. 캠프에 가세한 의원 숫자도 1위였다. 그러나 그 힘은 선거인단의 2%인 대의원 투표에서 2위(33~42%)로 따라붙는 걸로만 끝났다. 닷새 전 마주친 이재명 캠프의 전략가가 ‘충청 득표율 45~50%’를 예상할 때도 최대 변수는 이낙연·정세균이 선점한 조직을 꼽았다. 그 예측을 넘어, 조직을 넘어 바람이 분 것이다. 당원들을 태워 경선장을 오가는 ‘버스떼기’나 대면 접촉은 사라지고, 코로나 대선을 TV토론과 유튜브가 이끌고 있는 변화 때문일 수 있다. 추격자들의 네거티브도 판을 흔들지 못했다. 적어도 충청의 당원들은 “불안하다”는 이낙연의 공세보다 “필승 카드”라는 이재명의 손을 들어줬다. 정치 원로들이 대선에 견줘 하는 말이 있다. “시작도 끝도 내 장점을 살리는 사람이 이기더라”고…. 이재명은 그 선을 지키고 있고, 이낙연은 오락가락하고 있다.

2021년의 충청은 2002년의 광주와 닮은 게 있다. 봄기운이 돌던 그 3월에, 광주는 노무현을 승자로 세웠다. 호남 동교동 조직을 구파·신파로 양분한 이인제·한화갑보다 노무현의 본선 경쟁력을 택한 것이다. 이 가을에, 과반이 이재명을 찍은 충청의 당심도 그랬다. ‘영남 주자’ 노무현을 호남이 품었고, ‘비문 주자’ 이재명에게 친문 권리당원들이 힘을 실었다. 그날의 지역과 오늘의 기간당원이 서로 비교될 뿐, 민주당의 대선 역사에서 주류가 비주류 후보를 미는 또 한 번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재명의 대선 스토리는 충청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셈이다.

충청은 중도 확장력을 보여주는 땅이다. 그 중원의 승자가 예외없이 대권을 쥐었지만, 이겨도 TK·호남처럼 쏠림은 없었다. 선거 때마다 JP(김종필)의 고향 부여 입구엔 “여기는 오실 필요 없습니다”란 현수막이 붙었다. 그랬던 맹주 JP도 1987년 직접 나선 대선의 충청 득표율은 평균 30%에 그쳤다. 그 후로는 이회창·이인제·정운찬·반기문·안희정의 ‘충청대망론’이 명멸했다. 외려 지금껏 충청 대선의 다득표자는 육영수의 ‘향수’를 업은 박근혜(50~56.7%), 행정수도를 공약한 노무현(50.4~55.1%), JP가 도운 DJ(37.4~48.3%)였다. 모두 충청 밖에서 공약·연고·정치연합으로 접근했던 이들이다.

내년 대선도 진보·보수의 끝장승부로 가고 있다. 노무현이 이회창을 2.3%포인트 누른 2002년, 박근혜가 문재인을 3.6%포인트 이긴 2012년이 그랬다. 공교롭게 10년 주기로, 정권이 ‘시즌2’로 갈지 묻는 대선은 박빙이었다. 지금도 여론조사는 정권교체가 높고 가상대결은 여당 주자가 앞선다. 여도 야도 ‘45 대 45’ 지지선까지 팽팽히 가고, 누가 ‘50 고지’에 먼저 올라설지, 대한민국의 ‘방향’과 ‘해법’을 다투는 피 말리는 대선이 될 공산이 커졌다.

한사람이 속도를 내면 다 달리는 게 대선이다. 이재명 대세론이 충청을 찍고 돈 날부터 대선은 다시 빨라졌다. 보수 주자들은 이재명을 더 좌표 찍고, 문재인 정부에서 이재명으로 싸움터를 넓히고 있다. 여당의 대선 레이스는 12일 64만명의 1차 국민선거인단 투표 개표 때 첫 민심을 만난다. 반전이 있을까. 없으면, 추격자들은 해 저무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의 벼랑에 설수도 있다. 사실상 ‘마지막 1주일’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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