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젊은 시인을 기다리는 밤

오은 시인

지난 10월3일, 수경 누나를 보러 갔다. 꼭 1년 만이었다. 재작년부터 한가을은 늘 누나와 함께였다. 생전에 주고받은 e메일을 들여다보며 ‘잘 지내지? 거기에도 쌀 있지?’ 같은 물색없는 질문을 던진 후 혼자 웃기도 했다. 누나가 살아 있을 때 못다 전한 말을 이제야 건네는 것처럼, 대답을 듣지 못해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혼잣말하기도 한다. “누나라면 저 하늘의 색을 뭐라고 표현했을까?”

오은 시인

오은 시인

없는 존재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상상이라면 회상은 있던 존재를 떠올리는 것이다. 어릴 때는 상상하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했는데, 성인이 되고 나니 상상하는 자리에 종종 회상이 들어서곤 했다. 이는 그동안 많은 관계를 맺어왔다는 말도 될 것이다. ‘각자의 이야기’로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이 ‘서로의 대화’가 되면서 또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있던 존재가 사라지면 상실감이 생기게 마련인데, 이 감정은 예고 없이 찾아들어 사람을 각성시키곤 한다. 여름날에 난데없이 불어오는 가을바람처럼.

내 마음속 달력을 펼치면 한겨울에는 아버지가, 한여름에는 황현산 선생님이, 한가을에는 허수경 시인이 자리 잡고 있다. 달력을 넘길 때면 계절과 상관없이 슬픔과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눈비가 내린다. 나는 눈비를 달게 맞으며 그들을 회상한다. 아버지가 웃고 황현산 선생님이 웃고 수경 누나가 웃는다.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걸 빤히 알면서도 나는 묻는다. “왜 웃으세요?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이야기가 더 이상 대화로 이어지지 않아 회상의 끝에는 늘 아쉬움이 고인다. 그리하여 계절이 바뀌면 그리워지는 것이다. 무심히 불어온 바람결에서 어떤 마음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무심결을 꿈결로 만들어 적극적으로 돌이키고 싶은 것이다.

올해 허수경 시인의 3주기 추모제는 광명에 있는 금강정사에서 진행되었다. 작년처럼 진이정 시인의 28주기 추모제와 함께 치러졌는데, 문득 허수경 시인이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에 ‘진이정을 추억하다’라는 부제를 붙여 ‘눈 오는 밤’이라는 시를 썼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코로나19로 인해 현장에 모인 사람은 별로 없었으나, 각자의 자리에서 누나를 떠올린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책장을 뒤져 시집이나 산문집을 찾고 허수경의 문장에 밑줄 그은 이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3주기를 맞아 누나의 장편동화 <가로미와 늘메 이야기>(난다)가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누나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개작에 매진했다고 하는데, 문장 하나하나에 묻어나는 감정은 분명 애틋함이었다. 지킴이가 하산하는 늘메에게 해주는 말이 오랜 울림으로 남았다. “모든 일이 다 풀리고 난 뒤에도 산이 그리우면 그때서야 너는 진짜 산을 만나게 된 거다.” 생전에 누나는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에 있을 때는 거기를 꿈꾸었고 거기에 당도했을 때는 여기의 소란을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면서 미지의 장소를 그리워하는 법도, 익숙한 장소를 마음속으로 헤아리는 법도 터득했을 것이다. 마침내 진짜 산을 만났을 것이다.

허수경은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어디에 있든 자신의 시간을 살았다. 한국이든, 독일이든, 난생처음 발 딛는 발굴지든, 거기서 그는 시간의 깊이와 길이에 대해 헤아렸다. 거기에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들어차 허수경의 시가 쓰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틈나는 대로 ‘젊은’ 시인, 노점상, 노동자를 떠올렸다. 시의 마지막 연을 옮긴다. 누나가 평생 품었을 바람 같은 문장, 혹은 타국에서 간절히 기다리는 소식 같은 문장이다. “돌아오는 젊은 시인을/ 기다리는 밤.”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기다리는 사람. 그리움의 끝 간 데에는 아마도 저 사람이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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