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힘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자들과 협업을 하는 때가 종종 있다. 나름 낯선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기여할 부분이 없는지 살피는데, 내가 왜 연구에 끼어들게 되었는지 궁금해질 때도 있다. 협업을 제안하신 분들이 인문 사회 과학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면 더 그렇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인문학자가 포함되어야 프로젝트 선정이 쉽기 때문이라는 명쾌한 해석을 들었다. 융합 연구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인문학이 한 자리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거였다.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바깥에서 보는 대한민국은 날로 자랑스럽다. 우리 기술만으로 쏘아 올린 누리호도, 수준급 방역체계도 그렇다. 그런데도 힘든 사람은 늘어나기만 한다. 빈부격차, 노인 빈곤율, 자살률, 출산율, 그밖에도 수많은 통계들이 사회에 뻗어있는 우울과 분노, 좌절과 내적 빈곤을 대변한다. 마음이 곪아가는데 느긋하게 세상을 바라볼 여유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2022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은 29조원에 달한다. 10대 중점 분야로 정보기술(IT), 우주항공을 비롯한 과학기술과 감염병 등 안전 관련 예산에 투자가 집중된다. 민간 투자 역시 응용 분야에 치우쳐 있다. 기초학문보다 실험 비용이 많이 드는 응용학문에 예산이 많이 할당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수 있다. 문제는 융합 연구라는 명목으로 인문학이 수난을 겪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AI와 디지털이 야기한 대전환이 인간의 가치와 미래를 되묻는 시기다. 정부와 대학은 학제 간 통섭 연구를 장려하고, 이공계 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인문 사회 분야와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자들이 기술자들과 자리만 함께한다고 해서 비판력, 창조력, 융합적 상상력이 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사유하는 힘, 판단하는 힘, 자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인문학이 역할을 해야 한다면 이런 방법이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책 소비량이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표한 한국 내 서적 소비는 2019년까지 꾸준히 줄다가 코로나19 이후 30% 이상 증가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웹툰·웹소설 시장이 67% 커졌고, 단행본에서는 주식과 금융 관련 서적의 소비만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제 다수에게 책은 사유의 동반자라기보다 재미나 정보 취득의 수단인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생각이 힘을 잃은 것이 비단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만은 아닌가보다.

독일은 성찰과 사유의 나라다. 그들이 칸트의 후예인 덕도 있겠지만, 그것을 지켜가는 방식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독일 연방 교육부가 밝힌 인문 사회학 연구 지원의 대원칙은 다음과 같다. ‘시간의 자유와 창조적인 연구환경을 보장해 틀에 얽매이지 않은 결과를 나오게 하는 것’. 인문 사회학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장기 전략을 수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시간에 쫓긴 연구자들이 구색을 갖추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인문학자들을 모을 일은 없다는 거다.

독일의 인문학은 범위를 넓히며 방향을 모색해왔다.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문제를 마주한 인문 사회 과학자들은 통계, 프로그래밍 등 응용학문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인문학 연구는 변화한 시대에 걸맞은 지식의 재생산 위주로 재편되었다. 연구자들 스스로 자신의 분야에서 영역을 개척해가고 있다. 정부 예산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방 연구혁신보고서 2020에 집계된 2019년 독일 R&D는 전체 196억유로, 26조원가량이다. 1위는 보건 분야로 규모는 26억유로 정도이고, 항공과 에너지 연구가 뒤를 이었다. 인문 사회학 연구는 7위로 13억7000유로가 쓰였다. 인문학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은 있었어도 인문학 자체가 위축된 적은 없었다. 인문학은 학생부터 노인까지 전방위에서 교육된다. 16세 이상의 독일인 전체에 개방된 평생교육원은 전국에 900개가 있다. 이곳에서 언어,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수업이 해마다 70만번 정도 열린다. 그 결과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나라가 아무리 어려워도 난민들을 더 받으라는 요구. 각종 차별과 권위에 대항하는 외침. 그들이 수호하려는 가치는 인간에 대한 존중에 다름 아니다.

우리라고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인문 강좌는 해마다 늘고 사람들은 모여 책을 읽고 토론을 한다. 그 밖에도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건설적인 모임과 생각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인문학이란 숫자로 파악하기 힘든 것이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한 사회의 의식과 격조를 지탱하는 것, 생각하는 힘. 그리하여 조금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 인문학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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