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기름과 참깨

박진웅 IT 노동자

고소한 참기름을 만드는 것은 긴 수고를 필요로 한다. 참깨를 파종하고, 정성 들여 농사를 짓는다. 피땀 어린 시간이 지나고 수확한 참깨를 잘 말려야 하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고루 잘 마를 수 있게 이리저리 돌리고 뒤집어줘야 한다. 중간에 습기가 차거나 비라도 맞으면 금세 썩으니 신경 쓸 일이 많다. 잘 마른 참깨를 수확할 때에도 며칠에 걸쳐 몇 번을 털어낸다. 한 번에 참깨가 잘 쏟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얻은 참깨를 솥에서 고소한 향이 올라오도록 볶아가며 불순물을 걷어내고 기름기를 올라오게 만든다. 볶은 참깨를 착유기에 넣고 꽉 짜내면 한 솥의 참깨에서 고작 작은 병 하나를 채우는 기름이 나온다.

박진웅 IT 노동자

박진웅 IT 노동자

나는 참기름을 볼 때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생각난다. 사상 최대의 취업난과 폭등하는 집값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한쪽에 있다면 고가의 아파트, 외제차, 명품 브랜드, 이제는 디지털 콘텐츠마저 브랜딩과 오리지널리티를 갖기 위해 NFT라는 블록체인 기술까지 도입해가며 차별화된 삶을 드러내기 위한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삶은 마치 참깨를 키우듯 긴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길러야 하지만, 오늘날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티를 낼 수 있는, 안정적인 삶의 자리에 닿는 것은 착유기에서 짜낸 참기름처럼 한 줌의 사람들뿐이다.

이러한 구도는 다시 서울과 수도권, 수도권과 지방, 지방의 도시와 시골로 나뉘기도 한다. 서울 아파트를 못 사서 고통스럽다는 중산층의 비명이 일자리는커녕 인구 자체가 줄어서 도시가 황폐해져가는 지방의 중소도시 사람에게는 썩 공감하기 쉬운 고통은 아니다. 물론, 지방 도시민의 삶 역시 한국이 아닌 다른 제3세계의 국가와 비교한다면 비슷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이렇듯 우열을 비교하는 방식 아래에서는 자기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가장 우월한 삶의 자리를 찾기 전까지는 끊임없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야만 한다.

고가의 아파트 단지를 보면 성문처럼 거대한 문주가 세워져 있다. 이 문주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입주민과 입주민이 인정한 방문객뿐이다. 멀리서 보더라도 아파트 브랜드명이 멋들어지게 새겨진 거대한 문주를 보노라면 같은 국민의 지위를 갖더라도 어떻게 서로를 다르게 차별할 수 있는지를 세련되게 보여준다는 느낌이다. 이런 아파트는 투자재로서의 장점이 큰 것도 있지만, 결국 상대적으로 테두리 바깥의 사람보다 우월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경제적 안정감이 상대적 안정감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놀라운 것은, 문주 안에 들어선 사람들조차 또 다른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더 큰 부와 더 높은 지위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착유기 속 참깨를 담아둔 솥의 모양새와 다를 바가 없다. 테두리 안에 들어가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노력 어린 삶은 무척 진취적이고 대단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꼭 참기름이 되지 않더라도 적당히 살 수 있는 참깨의 삶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평등보다 공정이 중요한 사회에서 우리는 점점 이 질문을 잊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정신이라 부를 만한 ‘공정’은 우열을 정하는 정의에 대한 문제이다. 노력에 걸맞게 삶을 차별화하는 것. 그러나 사상 최대의 취업난과 높은 고용 불안정성이 나타난 오늘날엔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자리 자체가 빠르게 줄고 있다. 성공에 대한 높은 사회적 압력은 마치 고소한 참기름을 뽑아내듯 찬란한 삶을 조명하고 문주 안 사람들의 행복을 전시하지만 그들조차 나름의 박탈감과 불안을 겪는 것을 보면 결국 우리는 착유기를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참깨가 아니고 세상은 착유기가 아니어야 한다. 찌꺼기와 참기름으로 끊임없이 나뉘는 세상이 아닌, 나름의 참깨로도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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