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최준영 책고집 대표

늦은 밤 한없이 고요할 줄 알았던 신륵사 경내에 고요와 소요가 교차하고 있었다. 주위를 살폈으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누군가 토사곽란을 일으켰나보다고 동행이 일러주었다. 그러고 보니 절엔 부처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절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발걸음을 옮겨 강월헌(江月軒)으로 향했다. 강월헌은 고려 말 승려 나옹 화상의 다비식이 거행됐던 터에 지어졌다. 조선 초 양반네들이 종종 거기서 술판을 벌이곤 했다는데, 속세 떠나 노 저어 강을 오가던 김시습이 가렴주구들이 벌이는 술판을 볼 때마다 역겨워하며 욕을 해댔다는 얘기가 <매월당 김시습>(이문구 저)에 나온다.

목덜미를 훑는 밤바람이 찼다. 견딜 만은 했다. 간다던 가을은 아직 가지 않았고, 곧 온다는 겨울은 여태 오지 않았음이다. 달빛을 머금은 검은 강물이 이따금 빛을 반사했고, 그럴 때마다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최준영 책고집 대표

최준영 책고집 대표

4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남한강에 모신 뒤 심란하고 공허할 때마다 정자에 올라 바로 밑으로 흐르는 강물과 먼 데 산과 들을 주유한다. 바로 거기 내 어머니가 계신다. 강섶에 여울에 야산에 들에 기와에 나무에 풀에 벌레울음소리에 대기에 우주에, 내 마음에. 어느 한곳 어머니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니, 자연이 어머니이고 어머니가 곧 자연이다.

생전의 어머니는 많은 말씀을 하지 않았다. 다만 혼잣말처럼 되뇌는 것이 있었으니 자연과 삶에 관한 것이었다. ‘사는 건 그저 자연스러운 것에 따르는 것이여, 억지 부린다고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여. 자연을 거스르면 삶도 망가지게 되어 있응게, 자연스러운 삶이 곧 행복한 삶인 것이제.’ 욕망을 좇던 시절엔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말씀이 이제야 가슴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부음을 접했는데, 그게 그렇게나 슬프더라, 난데없이. 일본배우 기키 기린의 부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순전히 기키 기린 때문에 본다고 떠벌이고 다녔던 터였다. 내 딴엔 과장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영화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압도했다. 특히 <앙, 단팥인생 이야기>(가와세 나오미 연출)에서 들려주는 정겹고 눈물겨운 이야기가 그렇다.

“단팥을 만들 때 나는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것은 팥이 보아 왔을 비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요. 어떠한 바람들 속에서 팥이 여기까지 왔는지 팥의 긴 여행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어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햇빛이나 바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영화에서 그는 한편의 편지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잊지 마.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모든 아름다움은 자연에 있다. 자연과 어우러질 때만이 우리 삶은 빛난다. 우리는 그걸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그러니 이따금 누군가 그 자연의 소리와 빛깔과 향기를 환기시키면 새삼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일본에 배우 기키 기린이 있었다면 우리나라엔 배우 김혜자가 있다. 그가 연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했던 수상소감 역시 감당키 힘든 감동이다. 떨리는 그의 음성을 듣고 있노라면 여지없이 마음이 흔들린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콤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당신은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겨울의 길목에서 어머니 그리워 늦은 밤 신륵사 경내 강월헌에 올랐다. 볼에 부딪는 바람이 찼으나 피하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푸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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