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마음이 설레었으므로

이동미 여행작가

서울에 올 때마다 머물렀던 전셋집을 뺐다. 40년 이상 산 서울에, 내가 하던 일과 청춘이 가득한 서울에 더는 집이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베를린으로 간 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서운한 마음이 컸다. 서울에서의 삶이 진짜로 막을 내리고 다시는 커튼을 젖힐 날 없는 무대에 먹먹한 마침표를 찍는 날 같았다.

이동미 여행작가

이동미 여행작가

있던 짐은 천안의 부모님 댁으로 보냈다. 부모님 댁의 오래된 에어컨과 세탁기는 내가 쓰던 걸로 바꿨고, 남은 짐(침대와 소파, 책장 등)은 2층에 들여놨다. 이제 한국에 오면 이곳에서 지내다 가리라. 아픈 엄마, 한 해가 다르게 수척해가는 아빠와 하루라도 더 얼굴 보며 지내다 갈 수 있으니 이 또한 내게는 감사한 일이다.

부모님 댁으로 이사를 하며 가장 큰 일은 버리기였다. 살던 집보다 훨씬 작은 공간으로 옮기는 거라 한참을 버려야 했는데, 그걸 다 못해서 이사를 와서도 계속 버렸다. 안 입는 옷과 신발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듣지도 않는 CD들, 20년 전에 일했던 주간지와 잡지, 여행을 갈 때마다 받았던 호텔 파우치와 관광지 티켓, 오래된 성냥갑까지 끝도 없이 나왔다. 버려도 버려도 티가 안 났다. 얼마나 서랍마다 꽉꽉 넣어놨는지 까도까도 나오는 ‘개미지옥’이었다.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것도 많았지만 만지작거리다 다시 제자리에 놔둔 것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친구들과 주고받은 옛날 편지와 카드는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까마득히 잊고 있던 친구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편지를 읽었다. 여행을 갈 때마다 사 모았던 마그네틱 기념품도 다시 냉장고에 붙였다. 남국의 여행지에서 즐겨 입던 일탈의 옷들은 다시 옷장 속으로 들어갔다. 평상시엔 입을 수도 없는 스타일인데, 또 여행갈 날이 있겠지 하면서. 하지만 알고 있다. 옷보다 그 옷을 입었던 여행의 추억을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을. 옷을 보면 새록새록 기억나는 여행지에서의 싱그러웠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싶었다는 것을.

얼마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가까이에 이사를 한 친한 선배는 일기장을 가장 버리기 힘들었다고 했다. 나는 아직 버릴 엄두도 못 내는 목록이었다. 일기장과 매년 쓴 다이어리만 모아놓은 게 아직도 한 박스다. “불태우고 찢어서 버렸어. 더 이상 보지도 않는데… 나 죽은 뒤 누가 보면 더 처치곤란이야.”

죽음은 아직도 한참 뒤에나 있었으면 하는 일이지만 예고가 없는 것이기도 하니까, 선배의 말도 이해가 되었다. 버리는 데에도 마음의 정리가 필요하다.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것은 결국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에 깃든 마음이니까. 그 마음이 엷어지고 무뎌져야 제대로 버릴 수 있다. 무조건 버린다고 마음이 편해지고 인생이 새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도 버리지 못하고 살아남은 것들은 일단 놔두기로 했다. 왜 버리지 못할까 더 이상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버리려고 꺼냈다가 거기에 딸려온 과거를 마주하는 시간이 좋았으므로. 아직은 마음이 설레었으므로.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한 정리의 달인, 곤도 마리에의 말처럼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이 설레지 않을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보려고 한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시간이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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