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만 모르는 ‘차별의 빨간불’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차별금지법·평등법안이 발의되었고 국회 국민동의청원도 성공했지만 국회는 묵묵부답이다.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겨운 얘기만 반복되고 있다.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 역시 마찬가지다. 단언컨대, 이런 입장은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차별에 반대한다면 차별을 금지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나.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방법’에 반대할 뿐이라면, 법 제정 없이 차별을 금지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차별을 방치하겠다는 것인데, 국정의 총책임자에게 이것은 차별을 찬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중립에 서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조장하고 묵인하는 쪽과 한 배를 타는 것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사회적 합의’ 운운은 기만적인 정치기술이다. 정치인들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겠다’고 약속하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사회적 합의라는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어떤 정책이건 시민들과 논의하고 동의를 구해가며 추진해나가는 것은 필요하다. 문제는 다른 공약과는 달리 유독 차별금지법에 관해서만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딱지를 붙여 뒷전으로 밀어 놓는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사회적 합의 운운은 ‘하기 싫다’는 얘기를 돌려 말한 것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차별금지법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진행되어온 법안은 흔치 않다. 정치인들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동안, 시민들은 꾸준히 논의를 진행해 왔다.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공론화 과정이 있었다. 특히 작년 여름부터는 전례 없이 뜨거운 논의가 진행되었다. 각종 시민단체, 학술단체, 법조인단체 등에서 수차례에 걸쳐 차별금지법을 주제로 한 토론회, 강연, 설명회 등을 열었다. 언론은 혐오와 차별의 현실부터 차별금지법의 필요성까지 다각도로 차별금지법의 문제를 다뤘고 특히 KBS, MBC, SBS, JTBC 등 방송사들은 치밀한 팩트체크를 통해 ‘방송의 공적 책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어떤 단일 법안에 대해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이렇게 많은 논의가 있었던 적이 또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차별금지법 사회적 합의 운운은
‘하기 싫다’는 기만적 정치기술
차별 대처 미흡 땐 파멸적 미래
차별금지법 하나 제정 못한 채
한국은 예정된 파국 방치하나

개신교계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는 개신교인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여러 차례의 간담회, 토론회, 강연회 등을 통해 차별금지법이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배치되지 않음을 확인해 나갔다. 작년 7월에는 110개 이상의 개신교계 단체와 개인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그리스도인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회에 전달했고, 며칠 전에는 30여개 개신교, 천주교 단체가 뜻을 모아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를 발족시켰다. 개신교계의 반대는 더 이상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루는 핑계가 될 수 없다.

국민들의 인식 수준도 크게 올라갔다. 지난해 6월 차별금지 법제화에 찬성하는 응답자가 88.5%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 여론조사 결과는 그 정점이었다. 도대체 입법을 위해 어떤 사회적 합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정치인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일 것이다. 별 문제가 아니라고 보니까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온갖 요설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차별의 현실을 보면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 2020년 인권실태조사에 따르면, 1년간 어떤 이유로든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29.5%에 달한다. 시사저널에서 실시한 조사에서는 10명 중 6명이 ‘우리 사회가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만큼 차별과 혐오가 심각하다고 본다’고 답했다. 2021년 국가인권위원회 혐오표현 인식조사에서는 10명 중 7명이 혐오표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각종 실태조사에서도 결혼이주여성, 난민, 이주노동자, 동성애자, 인종적 소수자, 종교적 소수자, 트랜스젠더, 장애인 등에 대한 소수자 차별 문제에 빨간불이 켜졌음이 수차례 드러났다. 언론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혐오와 차별의 실태를 고발하는 특집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인들뿐이다.

차별금지법은 지금 여기서 차별받고 있는 당사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공동의 미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혐오와 차별에 적시에 대응하지 못한 사회의 미래가 얼마나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이미 여러 나라의 경험을 통해서 입증된 바 있다. 한국은 차별금지법 하나 제정하지 못한 채 예정된 파국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