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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차별을 부정한다면
대선에서 차별금지법이 쟁점이 된 것은 다행이다. 어쨌거나 유력 후보들은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입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후보, 입법은 필요하나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후보, 반대하는 후보가 있다. 누구에게 표를 던질 것인지, 판단기준이 하나 생겼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이 전부는 아니다. 차별에 대해 어떤 현실 인식과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중요한 문제다. 윤석열 후보는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고 했다. 다음날에는 “구조적 남녀 차별이 없다고 한 게 아니”라며, 그보다는 “개인별 불평등과 차별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쯤에서 구조적 차별이 무슨 말인지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구조적 차별’은 차별의 한 형태다. 유럽평의회의 개념 정의에 따르면, 어떤 조직에서 그 조직의 절차, 관행, 문화 등으로 인하여 소수자 집단이 겪게 되는 불이익을 뜻한다. 예를 들어, 여성이 국회의원이나 최고경영자가 될 수 없다고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 -
단문 메시지 정치의 명암
“여성가족부 폐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올린 이 단문 메시지가 정치판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실제로 이 단문 메시지가 올라온 이후 추락했던 지지율이 반등했고, 이준석 대표는 역시 두 단어로 논평했다. “(지지율이 반등하는 데) 이틀 걸렸군.” 짧은 메시지로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정치기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즐겨쓰던 전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트위터라는 매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짧은 메시지로 재미를 봤고, 이것은 대선 승리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짧고 단순한 메시지는 현대의 포퓰리즘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다. 물론 민주주의 자체가 포퓰리즘을 벗어날 수 없고 포퓰리즘이 늘 부정적인 결과만 초래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특정 정치세력의 이익에만 복무할 뿐, 국가 공동체의 중장기적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포퓰리즘이 특정한 집단을 도구화하거나 희생양으로 삼고 사회갈등을 심화시켜 ... -
실종된 인권정책을 찾습니다
지난주 주목할 만한 조사가 있었다. 한국인권학회에서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문재인 정부의 인권정책을 평가해달라고 했고, 인권단체들의 연대체인 ‘인권운동더하기’에서는 인권활동가들에게 문재인 정부의 인권 현실을 물었다. 인권학회 조사에서는 정부의 인권정책 성과가 미흡하다는 응답이 63.1%, 정부의 인권정책 전문성이 미흡하다는 응답이 58.4%로 나타났다. 인권운동더하기 조사에서는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밝힌 인권 과제들을 제시하고 부족했던 것을 선정했다. 여기에는 코로나19 방역과 집회의 자유 제한 및 감시 강화, 코로나19와 시설 문제, 국가보안법 철폐, 차별금지법, 고 변희수 하사 싸움, 페미니즘 백래시, ‘가짜난민’ 논란, 사법농단 사태, 반복된 노동자 사망사고,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제외 합헌 결정,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플랫폼 노동 등 불안정 노동의 확산, 현장실습생들의 죽음 등이 꼽혔다. “촛불에 담긴 열망을 무너뜨리며 공허한 말잔치에... -
정치인만 모르는 ‘차별의 빨간불’
차별금지법·평등법안이 발의되었고 국회 국민동의청원도 성공했지만 국회는 묵묵부답이다.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겨운 얘기만 반복되고 있다.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 역시 마찬가지다. 단언컨대, 이런 입장은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차별에 반대한다면 차별을 금지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나.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방법’에 반대할 뿐이라면, 법 제정 없이 차별을 금지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차별을 방치하겠다는 것인데, 국정의 총책임자에게 이것은 차별을 찬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중립에 서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조장하고 묵인하는 쪽과 한 배를 타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 운운은 기만적인 정치기술이다. 정치인들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겠다’고 약속하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사회적 합의라는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어... -
대선, 혐오에 대응할 준비는 되어 있나
‘동성애에 반대한다’,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대선 토론 방송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이 2017년 대한민국의 수준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시간이 되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쨌든 차별에는 반대한다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지만, 4년 동안 특별한 진전은 없었다. 시민사회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모든 것을 걸고 나섰지만, 정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입법은 국회 소관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입장을 낼 수 있고 정부 발의도 할 수 있으며, 현행법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널려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 가운데 국회에서는 심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아쉬움이 있다. 혐오나 차별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선거 시기의 분위기는 임기 내내 이어졌으니 말이다. 지난 4년 동안 한쪽에서는 여성, 성소수자, 난민, 이주자를 대상으로 혐오를 선동하고 한쪽에서... -
남혐 손가락 논쟁을 넘어서
남성혐오 논란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곳곳에 숨어 있는 남혐 손가락을 적발해내는 것은 ‘놀이’ 수준을 뛰어넘어 연일 언론지상에 오르내릴 정도의 사회적 의제가 되었다. 급기야 한 금메달리스트 여성이 남성혐오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까지 시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혐오와 차별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자, 소수종교신자 등 소수자 집단의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생긴 개념이다. 그런데 소수자를 보호하는 혐오·차별 관련 법제에서는 소수자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으며, 혐오 표현이나 차별을 개념 정의하기 위해 ‘차별금지사유’ 또는 ‘정체성 요소’를 사용한다. 즉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자, 소수종교신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금지한다고 규정하지 않고 성별, 장애, 성적지향, 출신민족, 종교를 이유로 한 혐오와 차별을 금지한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 헌법에는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 -
여가부 폐지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없다
여성가족부 존폐 논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급기야 최근에는 여론조사 결과 폐지 찬성 의견이 절반 가까이 나왔다. 어느 한 부처가 이런 신세가 된 이유를 따져보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무책임한 정치선동에 악용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하태경 후보, 유승민 후보가 여가부 폐지론을 들고 나왔다. 대선 공약으로 제출한 셈이다. 화제는 되었지만 실체는 허망하다. 2021년 여가부 1년 예산은 1조2395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0.2% 정도를 쓰는 미니 부처다. 예산 대부분은 가족·청소년 정책에 배정되어 있고, 여성정책에 배정된 것은 18%에 불과하다. 여성정책 예산의 대부분은 성폭력·성매매·가정폭력, 아동·청소년 성범죄, 여성폭력, 경력단절여성, 성인지 관련 정책 등에 쓰인다. 아무리 여가부에 비판적이어도 이러한 예산이 낭비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가부가 없어진다고 한들 아낄 수 있는 예산은 거의 없다는 얘기다.... -
이준석 대표! 문제는 ‘할당제’가 아니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할당제 폐지’ 논의를 제기했다. 좁게 보면 공천에서 청년·여성·호남 할당제를 폐지한다는 내용이지만, 그가 늘 얘기했던 공정과 능력주의의 맥락과 일맥상통하기에 그의 정치이념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대표는 정치 이외의 영역에서도 할당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그런데 할당제가 정말 문제일까? 여성할당제만 놓고 보자. 얘기가 하도 많이 나오니 온 세상이 여성할당제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 적용되는 영역은 극히 일부다. 일단 공직선거에 적용되는 여성할당제가 있다. 공무원 임용에는 양성평등채용목표제가 있지만, 여성은 더 이상 그 수혜자가 아니다. 민간기업에서는 여성할당제 자체가 없었는데, 2019년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여성 임원 할당제가 도입되었다. 2003년까지만 해도 국회의원 중 여성의 비율은 5.9%에 불과했는데, 2004년에 13%로 늘었고 2020년에 이르러야 겨우 19%가 되었다. 2000년대 이후 법률로 여성할당... -
혐오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혐오는 그 자체로 나쁘다. 그런데 혐오는 ‘옳지 않다’는 당위와 윤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값비싼 비용을 치르게 한다는 점에서도 최악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자 한다. 혐오와 차별은 소수자 집단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한다. 인구 집단의 일부가 평등한 기회를 제한당한다는 것은 그들의 역량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은 하나같이 차별금지와 다양성 증진을 강조한다. 윤리적 양심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기업에 손해라는 합리적 ‘계산’도 깔려 있다. 경영컨설팅회사 매킨지가 2020년 발간한 보고서 제목은 ‘다양성이 이긴다’였다. 또한 혐오는 우리 사회가 처한 진짜 문제에 눈을 가리고 엉뚱한 곳에서 불필요한 싸움을 벌이게 만든다. 미국과 유럽의 극우들은 ‘먹고살기’ 힘들어졌다며 동유럽,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에서 온 이주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
더 이상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해묵은 입법 과제 두 건이 있다. 퇴행과 전진을 반복하는 게 역사라지만, 답보 상태가 너무 길다. 노무현 대통령의 ‘4대 개혁 입법 과제’였던 국가보안법 개폐는 논의조차 사라진 지 오래다.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법안에 서명한 의원 명단을 살펴보니 지금도 정부, 청와대, 국회에서 활약 중인 정치인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국가보안법 개폐에 실패한 후 정부 지지율이 급락했던 트라우마 때문인지, 2004년 이후 국가보안법을 입에 담는 사람들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노무현 정신 계승을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의제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김일성 회고록’ 출판을 둘러싼 시대착오적 논란이 2021년에 또 반복되었고, 2017년 이후 4년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723건이 접수되었고 94건이 기소되었다. 혁명동지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대법원 유죄 판결이 나온 게 작년의 일이다. 차별금지법 역시 노무현 정부 때 추진되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