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 갈림길에 서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범의 불편한 진실] 심상정, 갈림길에 서다

대선 후보를 뽑기 위한 주요 정당의 경선이 끝났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더불어민주당의 정세균 후보가 ‘연대임금제’를 공약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아~’ 소리에는 경탄과 탄식이 반반 섞여 있었다. ‘경탄’했던 이유는? 연대임금제를 도입하려면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을 낮추거나, 적어도 인상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일자리 20%’와 ‘그렇지 않은 80%’가 양분되어 있는 한국에서, 상위 20% 노동자들의 양보를 이토록 당당하게 요구하는 공약은 처음이다. ‘탄식’했던 이유는? 이것이 정의당이 아니라 민주당에서 나왔다는 점 때문이다. 정의당은 최근 세 번의 총선 및 대선에서 연대임금제에 필적할 만한 공약을 내놓은 바 없다(공식 공약집 기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및 초과이익공유제를 내놓긴 했지만, 연대임금제는 이 정책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연대임금제란 이른바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충실한 제도다. 어느 회사에 고용되어 있는지 상관없이, 비슷한 일을 하면 비슷한 임금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임금 교섭도 기업별로 따로 하는 게 아니라 산업별로 한꺼번에, 이른바 ‘산별 교섭’을 한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제도다. 2020년 기준 현대자동차 직원 평균 연봉은 9000만원 정도인데, 1차 하청업체 연봉은 그것의 2분의 1밖에 안 되고 2차 하청업체는 3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런데 원청-1차 하청-2차 하청 업체들의 연봉을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예를 들어 모두 6000만원으로 맞춘다면? 놀랍게도 독일, 스웨덴,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주요 국가들은 이렇게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업 간 임금 격차가 적다. 일본은 법적으로는 기업별 교섭이지만 특이한 관행들을 통해 산별 교섭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그래서 중소기업 평균 연봉이 대기업의 80%에 달한다. 한국에서 겨우 55%인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임금 격차가 적으니 최저임금제도가 덜 중요하다. 독일은 최저임금제를 2015년에야 도입했고 스웨덴에는 아직도 최저임금제가 없다.

한국의 진보 운동계에는 사민주의를 백안시하는 전통이 있다. 1980년대 한때 뜨거웠던 혁명론의 잔열 때문이다. 그런데 사민주의는 단순히 노동자를 보호하고 복지를 늘리자는 얘기가 아니다. 사민주의는 시장원리를 끌어안고 활용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것 자체가 노동자 간 연대를 통해 임금경쟁을 방지하자는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시장원리의 핵심을 담고 있다. 비슷한 일을 하는데 A기업 노동자는 5000만원을 받고 B기업 노동자는 2000만원을 받는다면, 이것 자체가 시장원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B기업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있거나, A기업 노동자가 지대적 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기술력이 높은 기업에 고용되어 있고, 해고가 어렵다는 이유로).

사민주의는 시장을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해 ‘활용’하는 데로 나아간다. 산별 교섭을 통해 비교적 높은 수준으로 임금이 책정되면, 부가가치가 낮은 업체는 오히려 파산이 촉진될 것이다. 그러면 파산한 업체를 대기업이 인수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계기로 삼는다. 그래서 사민주의자들은 기업의 덩치가 커지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에게는 실업급여를 주면서 수준 높은 재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역량을 높이고 재취업하도록 돕는다. 그래서 사민주의자들에게 평생교육의 핵심은 인문학이 아니라 고등 직무교육이다.

정의당의 미래가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들 이념은 강력한 ‘가치’를 내재하고 있지만 ‘체제’(특히 경제체제) 수준에서는 사민주의를 대체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진다. 정의당의 핵심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민주의의 핵심을 받아들이면 현대자동차 노조로 대표되는 민주노총 주류와 심각한 갈등에 빠지고, 그렇다고 사민주의를 외면하면 민주당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무상급식’을 민주당이 따라하는 데에는 10년 가까이 걸렸지만, 심상정 후보의 ‘주4일 근무제’는 이재명 후보와 사실상 동시에 나오지 않았는가? 심상정 후보 앞에 놓인 갈림길이 정치공학 수준으로 재단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Today`s HOT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인도 스리 파르타샤 전차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시위대 향해 페퍼 스프레이 뿌리는 경관들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불타는 해리포터 성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