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열 원천은 ‘가난’ 아닌 ‘평등’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범의 불편한 진실] 교육열 원천은 ‘가난’ 아닌 ‘평등’

나는 교육과 가난을 연결시키는 담론을 의심한다. 한국인들이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힘썼다’는 클리셰는 실증 자료와 상충한다. 무엇보다 한국은 그리 가난한 나라가 아니었다. 1960년 1인당 국민소득을 보면 인도(84달러), 중국(92달러), 태국(101달러)보다 한국(155달러)이 높았다. 아시아에서 당당히 중상위권이었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는 전설은 1950년대 초에나 유효하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가난하면 자녀를 교육시키기 어렵다. 당시 고등학교 등록금이 대학 등록금의 절반에 달했다.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를 보내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우골탑의 신화, 즉 ‘소를 팔아’ 또는 ‘논을 팔아’ 자녀를 대학까지 보내는 일이 잦았다. 그만큼 ‘소’와 ‘논’ 등의 자산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의하면 1960년 기준 세계에서 토지 소유가 가장 균등한 나라는 놀랍게도 한국이었다.

이것은 농지개혁의 결과다. 국가가 지주의 땅을 수용해서 소작농에게 나눠주는 혁명스러운(!) 일을 벌인 건데, 이는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환이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가 일본·대만·한국에 강력한 농지개혁을 주문한 것이다. 일본의 농지개혁은 당시 군정 사령관이던 맥아더가 직접 지휘했고, 대만과 한국에서는 장제스 총통과 이승만 대통령이 책임을 맡았다.

농지개혁을 통해 분배된 토지는 장학금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필리핀의 농민들은 자녀를 교육시키기 어려웠다. 대부분 소작농이나 농업노동자이기 때문에 자산도 없고 소득에도 여유가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유난히 토지가 평등하게 분배된 한국·대만·일본의 자영농들은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대학을 꿈꿔볼 수 있었다. 소득에 최소한의 여유가 있었고, ‘소’와 ‘논’이라는 자산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대입 경쟁이 가장 치열한 나라로 한국·대만·일본이 꼽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육열의 원천은 ‘가난’이 아니라 ‘평등’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우리는 국가가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개념에 익숙해졌다. 올해 고등학교 무상교육이 시작되었고, 최근 대학 등록금은 과거에 비해 부담이 꽤 줄었다. 소득이 적을수록 국가장학금 혜택을 많이 받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소’나 ‘논’을 팔지 않아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듯하다. 하지만 대학에 가지 않는 3분의 1의 청년들의 입장에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용사를 예로 들어보자. 미용실에서는 월급제 직원과 이른바 ‘디자이너’로 나뉜다. 디자이너는 고객에게서 받은 돈을 미용실 원장과 비율제로 나누기 때문에, 미용실에서 일하는 많은 청년들은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그러려면 고급 미용기술을 배워야 하고, 이를 위해 종종 수백만원을 들여 사설 학원에서 교육을 받는다.

미용 디자이너는 그나마 돈을 들이면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용접공의 경우 교육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대형 조선업체에 고급 용접 기술을 가르치는 사내교육 프로그램이 존재하는데, 이는 바늘구멍을 통과해 대기업 정규직이 되어야만 기회가 있다. 하청·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대다수의 청년 용접공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건축·인테리어 현장에서 일하는 목수, 타일, 미장, 도배 등의 기능직은 어떤가? 일정한 숙련도에 이르면 준수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인데도, 특성화고와 전문대에서 줄곧 외면해왔다. 현장에서 위험과 불안을 무릅쓰고 도제식으로 배워야 한다. 한국 직업교육 최고의 공백이 여기에 존재하는데 수십년간 이런 문제가 진지하게 거론되지 않았다.

이재명 대선 후보가 지난 5월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청년들에게 해외여행 경비라도 지원하자’고 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나도 ‘해외여행’에는 갸우뚱했다. 하지만 ‘대학에 가면 각종 혜택을 주면서 대학에 가지 않은 청년들은 왜 외면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이번 대선이 교육부 중심, 인문계고 중심, 4년제 대학 중심의 교육관에서 벗어나 청년 미용사, 청년 용접공, 청년 건축목수에게 ‘소’와 ‘논’을 어떻게 쥐여줄 것인지를 의제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