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범의 불편한 진실] 교사에게 권력을

살다 보면 벼락같은 깨달음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 10년쯤 전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으로 일하던 시절, 한 교사를 만나 논의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논의를 마친 후 그가 쭈뼛쭈뼛 머뭇거리며 뭔가 다른 얘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몇 학년, 무슨 과목을 담당하게 될지를 신학년 시작하기 겨우 일주일 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벼락에 맞은 느낌이었다. 20년쯤 전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던 시절, 나는 개강하기 두세 달 전부터 준비했다. 그런데 학교 교사들에게는 준비할 시간을 겨우 일주일밖에 안 준다니?… 아, 한국의 교사에게는 ‘교권’이 없구나.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나의 문제제기에 대한 교육청 내의 반응은 냉담했다. 3월1일자로 인사이동이 이뤄지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고, 여지껏 별 탈이 없었는데 뭐가 문제냐는 논리였다. 지금도 대형 회의실에서 교육청 간부들이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눈초리가 기억난다. 이들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테일러주의의 핵심인 구상과 실행의 분리, 즉 ‘구상’은 높으신 분들이 할 테니 교사들은 매뉴얼대로 ‘실행’만 하라는 것이 한국 공교육의 뼈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교육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미국의 교육학자 랄프 타일러는 테일러주의에 깊이 영향받은 사람이었다.

2017년부터 인사발령일이 2월1일로 앞당겨져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교사가 담당할 학년·과목을 신학년 2~3주일 전에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상당수 혁신학교와 일부 사립학교에서 신학년 2~3개월 전에 담당 학년·과목을 알려주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게 예외적인 경우지만 여러 선진국에서는 이게 표준이다. 수업을 기획하고 교재를 만드는 데 온전히 2~3개월을 들이는 것이다.

한국에서 교사는 수업과 평가를 기획하고 개발할 권한을 심각하게 제약당하는, 졸(卒)에 가까운 존재다. 교과서 선택권은 거의 없다. 검정교과서가 여러 종 나오지만 내용이 오십보백보고, 초등은 아직 국정교과서를 쓴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교사가 자신이 사용할 교과서를 스스로 ‘집필’할 권리까지 주는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시행하는 선진국이 17개국인데, 이 나라들과는 비교조차 어렵다. 교육과정도 문제다. 어느 나라든 몇 학년 때 무슨 내용을 가르칠지를 수록한 국가 교육과정(커리큘럼)이 존재한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과정을 보면 내용이 매우 상세하여 교사가 자율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창의적인 요리를 만들어내라고 하면서 식재료·요리도구·요리시간 등을 자세하게 규제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영국의 국가 교육과정을 보면 분수(分數)와 관련하여 꼭 배워야 할 내용은 몇 줄에 불과하고, 핀란드 교육과정은 더 단순해서 “분수 개념을 배우고 다양한 상황에서 분수를 적용하는 기초 계산법을 익힌다” 단 한 줄에 그친다. 디테일은 현장 교사들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여러 교육학자가 ‘교과서 자유발행제’나 ‘교육과정 간소화’를 주장하곤 했다. 이들 중 보수로 분류되는 곽병선(전 교육학회장), 문용린(전 서울시교육감), 김재춘(전 청와대 교육비서관) 등은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옹호했던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캠페인에 합류함으로써 스스로 흑역사를 썼다. 그렇다면 진보는? 2017년 시도교육감협의회와 교육부의 논의 테이블에 의제로 올려진 적이 있을 뿐 이후 진전이 없다. 그리고 이번에 개정되는 ‘2022 교육과정’ 관련 논의를 보면 교육과정에 민주시민교육이나 생태교육 같은 뭔가를 집어넣자는 논의만 무성했을 뿐, 뭘 빼자는 논의는 완벽하게 실종되었다. ‘교육과정 간소화’를 주장한 곳은 기독교계 교사단체인 좋은교사운동이 유일했다.

한국 교육의 양대 과제 가운데 ‘경쟁 완화’는 그래도 논의가 이뤄지고 있지만 ‘교권 선진화’는 실종 상태다. 보수는 국정교과서 파동 때 스스로 자유주의자가 아님을 자백함으로써 개혁의 명분을 잃었고, 진보는 스스로 교육청에 포진한 관료가 되어 개혁의 동력을 잃었다. 보수든 진보든 ‘더하기 개혁’이 아닌 ‘빼기 개혁’, 교사의 자기해방을 위한 아래로의 권력 이양, 교사 개개인의 창의력을 활용하는 집단지성의 구성을 확고하게 지표로 세우는 쪽이 리더십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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