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이 논변을 대체하는 정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야당 대통령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단 일곱 글자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것은 구호인가, 암호인가. 아니면 어떤 주문인가. 여성가족부의 구조개혁은 야당은 물론 여당도 오랫동안 검토해 온 사안이기에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는 대체로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이유도 대안도 없고, 연관된 사안을 검토한 흔적도 없이 냅다 두 마디를 던지는 대통령 후보라니.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당연히 어엿한 정부부처 하나를 그저 없애자는 말이 아닐 것이다. 여성가족부는 기획재정부, 과기정통부, 교육부 등과 함께 정부부처 구조개혁 대상으로 자주 언급되어 온 부서다. 따라서 목적과 조직은 물론 관할과 업무에 대해서도 이미 여기저기 쌓인 논의들이 많다. 다만 그런 논의들을 갈래지어서 짜임새 있게 공약으로 엮은 논변이 귀할 뿐이다.

그런데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던지듯 말하는 방식은 이미 나쁜 우리 정치를 더 나쁘게 만든다. 토론이 없이 외치는 데 능하고, 논변이 없이 주문을 외는 데 능한 우리 정치 말이다.

여성가족부 강화. 심상정 후보가 맞불 놓듯이 냈던 구호다. 마찬가지로 실망스럽다. 다음 날 그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엄존한 우리 현실에서 여성의 인권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유지해야 마땅하다고 부연했다.

나는 그 발언의 취지에 완전 동의하지만, 심 후보가 밝힌 이유를 읽어보고 약간 질렸다. 최근 몰아치는 여성주의에 대한 반동에 합류하는 젊은이들은 물론 여성주의 의제 자체에 무심한 유권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설득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젊은 남성에 대한 차별은 ‘그 자체로 해결할 일이지, 여성의 권익을 깎아서 보충할 일이 아니다’라는 심 후보의 주장이 그랬다. 애초에 여성가족부 폐지 같은 구호가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갈라치기 위해서 나왔는지 이미 잘 알고 있는 유권자들에게 무심하게 들릴 만한 주장이었다. 그리고 차별시정의 과제라면 남녀는 물론 지역과 노소, 그리고 주요 정체성 집단들에 대한 차별을 함께 놓고 해결책을 강구해야지 어떻게 ‘그 자체로’ 해결할 수 있을까.

이번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여성가족부 존폐론이 다른 여성주의 의제들을 대체하는 양상이 수상하기 짝이 없다. 실로 ‘여가부 폐지’란 말은 한때 인터넷 공동체 하위문화에서 김정은 또는 시진핑을 목적어로 한 어떤 열쇳말과 동급으로 사용되는 정도였다. 일종의 질 낮은 ‘십자가 밟기’ 놀이처럼 유통하던 말이었다. 이제 대통령 후보들이 나서서 이를 진지하게 거론하고 있다. 암호처럼 주문처럼 돌아다니던 말들이 그럴듯한 공약이 되어 등장한다.

여성가족부 존폐를 따지는 수준으로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제대로 논변을 전개할 도리가 없다. 특히 그 존폐론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라는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정책에 대한 구체적 평가와 가능한 대안과 별 관련이 없다면 더욱 그렇다. 이래서는 여성주의 의제는커녕 여성과 관련한 어떤 정책 사안이라도 의미 있게 토론하는 일 자체가 어렵게 되고 만다.

최근 여성주의 운동에 대한 반동이 거세다고들 말한다. 역사적으로 반동이 없는 운동이란 없다. 그러나 한국 여성주의가 당면한 현실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위험한 반동의 실체는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책의 수단 목적 간 타당성과 정책적 성과에 대한 논의를 의미 있는 방식으로 하지 않으려는 자세로 나타난다고 본다.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책의 실패와 성공이 아닌 그 정책에 대한 시민적 반목과 대립에 주목하는 언론이 대표적이다. 이제 100일도 남지 않은 선거를 앞두고 난데없이 여성가족부 존폐에 대한 주문을 외는 우리 정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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