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터에서 자라는 아이들

인형과 구슬, 바퀴, 줄, 막대와 공은 예부터 어린이들의 장난감이었다. 줄을 잡아당기면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는 나무 인형이 3500년이나 된 나일강 유적지에서 발굴된 적이 있다. 고대 아이들은 줄을 당기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아즈텍제국의 어린이들이 갖고 놀았다는 바퀴 달린 동물인형 유물도 유명하다. 이음새가 정교해서 수백 년이 지났지만 도르르 잘 굴러간다. 애리조나주의 인디언들은 제례의식을 마치고 나면 아름답게 색칠한 카치나 인형을 아이들 손에 쥐여주었다. 어린이들은 오늘 어떤 인형을 갖게 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잘 노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기분이 좋아진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어린이가 마음껏 뛸 수 있는 놀이 공간이 설계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1859년 잉글랜드 맨체스터에서 개장했던 한 놀이터가 최초의 대중적 놀이터로 알려져 있다. 놀이터를 디자인하는 귄터 벨치히는 “놀이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개인의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시설물을 타고 올라가고 균형을 잡고 미끄러지는 다양한 행동은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진보적인 교육학자들은 ‘놀이터운동’을 펼쳤다. 놀이야말로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며 성장의 기초라고 생각했다.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과 함께 연령이나 신체조건을 무시한 획일적인 놀이터가 보급되던 시기도 있었다. 냉전시대였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로켓 모양의 놀이기구가 유행한 것은 당시 경쟁적으로 진행되던 우주개발 욕망을 보여준다. 건축가 카를레스 브로토는 <세계의 놀이터 디자인>에서 놀이터의 조건으로 다음 몇 가지를 이야기한다. 주위 환경과 상호작용할 수 있어야 하며 경계가 있어 차별화된 느낌을 주어야 하고 누구든지 어려움 없이 찾아올 수 있어야 한다. 오르내리는 재미가 있어야 하고 시설물이 안전하게 마감되어 있어야 하며 놀다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공간이 우리 곁에 있었다가 얼마 전 문을 닫았다. 2010년 12월, 서울 관악구 은천동에 개관했던 ‘관악 어린이 창작 놀이터’다. 이곳은 지은 지 30년이 넘은 옛 은천동 동사무소를 리모델링하여 만들었으며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했다. 그 후 11년 동안 약 15만명의 어린이와 시민이 이곳에서 놀이를 즐겼고, 놀이를 통한 창조와 예술의 기쁨을 누렸다. ‘왁자지껄 소문난 잔치’(2011)를 열어 동네 사람 모두 놀이 친구가 되어 어울렸으며, ‘예술로 부모플러스’(2017)를 통해 가족이 함께하는 예술놀이의 경험을 쌓아갔다. 커튼을 내린 뒤 방석 하나만 들고 앉으면 뚝딱 극장이 되었던 ‘관악명랑방석극장’(2012)은 ‘예술로 상상극장’(2016)으로 자라났다. 그동안 21편의 소규모 어린이극이 만들어졌고 2만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이 연극의 배우가 되거나 관객이 되었다. 청각장애 어린이를 위한 배리어프리 연극도 제작되었다.

나는 이 놀이터를 부지런히 드나들던 어른 친구 중 한 사람이었다. 몇 년 전 옥상 놀이터에서 어린이들이 설치작품을 만들고 있었는데 소나기가 내렸다. 그때 스르르 움직여 소중한 작품을 지켜주던 신기한 자동 덮개와 빗소리만큼 우렁차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잊지 못한다. 놀이터 바로 옆에는 관악소방서 봉천파출소가 있는데 옥상에서 소방서를 내려다보면서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던 기억도 난다. “여기서 활활 타오를 것처럼, 불덩이처럼 놀아도 돼. 소방차들이 출동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우리를 구해줄 거야.”

‘관악 어린이 창작 놀이터’는 한 권의 두툼한 아카이브 북을 남기고 2021년 12월31일 운영을 종료했다. 텅 비어 있는 것 같지만 꽉 찬 공간이었다. 사업은 종료되지만 이 사업의 가치 시효가 다 된 것은 아니라는 에필로그의 말이 안타깝게 남는다. 아이들은 빈터에서 자란다. 아름다운 빈터 하나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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