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ㅂㅈㄱ(가보자고)

이기수 논설위원
[이기수 칼럼] ㄱㅂㅈㄱ(가보자고)

큰 선거, 대선(大選)이 끝났다. 1639만표 대 1615만표. 당선인 윤석열과 패자 이재명은 헌정사에서 13번의 직선제 대선을 완주한 92명 중에 득표 1·2위에 올랐다. 대선 득표차 24만표(0.73%)는 총선에서 240표와 비슷할 게다. 그렇게 길은 다시 꺾였다. 5년 만에 오른쪽으로…. 세상은 인수위와 비대위로 분주하다. 해질녘 저 멀리 언덕 너머 나타난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모르겠는 시간이다. “겨울이 오고 있다”는 이와 “봄을 기다린다”는 이가 갈린다. 대선은 저마다 다르게 맺히고 지나간다. 내게도 아린 것, 걱정스러운 것, 아쉬운 것이 남았다.

이기수 논설위원

이기수 논설위원

#번데기 된 딸 = “아빠, 왜 끝났다고 해?” 10일 새벽 3시 20대 딸의 카톡이 왔다. “아직 300만표 남았다며. 제발~” 개표방송엔 ‘윤석열 유력’이 떴을 때였다. 밤을 꼬박 새운 듯했다. 새벽 4시, 딸은 친구와 나눈 카톡을 보내왔다. “저거 졌다고 우리가 무너질 리가…힘내자.” “희망 놓지 말자.” “밥 잘 먹고.” “너도….” 눈물 자국이 보였다. 저리 절박했을까. 새해 첫날 “꼭 투표해야 돼?” 묻던 딸은 “이준석과 윤석열이 여자를 밟고 사는 세상이 무섭다”고 하다가, 어느새 그 또래들처럼 “간절재명”이 돼 있었다. 그리고 9시, 딸은 ‘번데기’ 이모티콘을 보냈다. “너희 목소리와 존재감 아무도 무시 못한다”고 답을 줬지만, 새 집권자들은 ‘여가부·성비 할당제 폐지’를 밀고 간다. 인수위 분과 명칭에서 여성도 뺐다. 번데기가 품었을 아픔이 아려온다.

#검찰공화국 = 윤 당선인은 검찰의 직접수사를 확대하고, 예산편성권을 주고, 법무장관 수사지휘를 없애겠다고 했다. 기소독점 견제 장치를 다 푸는 것이다. ‘괴물 검찰’로 불린 게 두해 전까지다. 지연·직연으로 통하고, 제 허물은 덮고, 정치검사와 전관예우가 판쳤다. 그 악몽 탓이다. 윤 당선인이 쓴 ‘검찰권 강화·독립’을 사람들은 ‘검찰공화국 부활’로 읽는다. 정치보복과 협치는 동행할 수 없다. 민정수석실 없애고 대통령과 검찰 수뇌부가 눈빛 대화하는 시대가 오는 것일까.

#멀어지는 개헌 = 대선에 다가왔던 게 있다. 개헌이다. 민주당이 1년 내 개헌을 공약했고, 안철수·심상정·김동연도 결선투표제와 비례대표 확대에 공감했다. 윤 당선인의 승리 후 개헌 에너지는 다시 푹 꺼졌다. 35년 전의 헌법은 낡고 좁다. 아빠 육아휴가·존엄사·자율주행차·비정규직·반려동물·기후위기란 말도 없거나 간과할 때였다. 오랜만에 개헌 얘기꽃이 폈다 진 게 못내 아쉽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야당 시절 얘기다. 선거 끝나면, DJ는 홀로 서가에 앉아 긴 전지(全紙)에 선을 그었다고 한다. 한쪽엔 잘한 것, 다른 쪽엔 못한 걸 적었다. 진 선거는 사색이 더 길어졌고, 그 끝에야 DJ는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면 여야가 부여잡을 화두는 뭘까. 여당은 ‘5년 만의 정권교체’, 야당은 ‘0.73% 신승과 여소야대 국회’일 게다. 겸허해지라는 표심일 게다. 당선 확정 7시간 뒤 “(선거 결과를) 다 잊어버렸다”는 새 대통령 말은 독단과 불통으로 비칠 수 있다.

보수야당은 기호지세다. 6월1일 지방선거까지 “새 대통령에게 힘을 달라”고 할 것이다. 중심 못 잡는 곳은 으레 진 쪽이다. 172석 거야(巨野)엔 벌써 ‘이재명 사용법’이 회자된다. 이재명을 찍은 1615만표와 지지축을 반전 동력으로 삼자는 말일 게다. 비대위원장 시키자는 이까지 등장했다. 선후가 틀렸다. 민주당은 스스로 가죽을 벗어야 한다. 대선판에서 “달라지겠다”던 말을 지키고, 자영업자·정치개혁 공약을 엄수하고, 성평등·검찰공화국·기후위기 후퇴를 막겠다고 공언한 선을 사수해야 한다. 그때에서야 민주당은 다시 설 힘을 찾고, 불어나는 2030 여성 당원이 천군만마가 될 수 있다. 본디, 대선 패장의 진퇴는 무거웠고 무거워야 한다. 아쉬움과 열망이 크다고 모르핀주사처럼 찾지 말아야 한다. 180도 달라진 당에서 이재명을 호명하고 사용법을 논하는 게 맞다.

선거는 세상을 들었다 놓는다. 이긴 쪽도 진 쪽도 착하게 만든다. 고개 숙이며 한 말과 약속이 많아 표변할 수 없다. 그러다 한쪽이 고개 들면 다시 발톱 세우는 게 정치다. 앞으로도 윤석열과 이재명의 말은 꽤 멀리 소환되고 부딪칠 게다. 2030 커뮤니티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댓글 초성어가 있다. “ㄱㅂㅈㄱ(가보자고).” 정치를 즐기고 내 것으로 여기고 표밭을 갈자는 그 유쾌함이 좋고, 때론 부럽다. 여도 야도 가볼 것이다. 다시 인수위, 정부조직 개편과 인사청문회, 대통령 취임사, 지방선거까지…. 윤석열 정부 5년을 압축해서 볼 80일의 길싸움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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