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도 봄을 기다리는 사람

오은 시인

약국에 들렀다. 코로나19 자가검사키트를 사는 사람, 만일에 대비해 상비약을 구입하는 사람,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이 조제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한겨울 추위 같은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다. 준비할 때의 비장함, 바로잡을 때의 간절함이 물씬 느껴졌다. 마스크 안의 속사정이야 알 수 없겠으나 표정이 어두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대비하는 사람과 수습하는 사람의 마음은 별도리 없이 복잡하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뭐 필요하세요?” 약사가 물었다. “소독약과 찰과상에 바르는 연고 좀 주세요.” “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약국 안쪽에 있는 기다란 의자에 앉아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그사이 적어온 메모를 보고 종합 감기약, 인후염에 잘 듣는 약, 해열제 등을 사는 사람을 보았다. “혹시 몰라서 미리 사두는 거예요.” 약사에게 건네는 그 말에서 여유가 아닌 다급함이 느껴졌다. 턱밑에까지 온 어떤 위험 앞에서, 내가 구매하는 약품은 사소하게 느껴졌다. 나도 미리 사둬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소독약과 연고를 받았다. 사야 할 물건을 샀는데도 왠지 미련이 남아 머뭇거리듯 약국 문을 나섰다.

“엄마, 3월이면 봄이야?” 약국 밖으로 나오니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꽃이 피었잖아. 봄이 온 거지.” 아이는 앞으로 꽃이 핀 모습을 보고 봄이 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봄인데도 때로는 겨울옷을 입기도 한다는 것을, 봄이면 으레 학년이 바뀐다는 것을, 봄이어서 괜히 설레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는 것을 체득할 것이다. 한겨울에 봄을 상상하고 봄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할 것이다.

그날 오후, 볼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혼자 밥을 먹었다. 식사하기에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많았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한 뒤 줄곧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원하게 활보하는 사람이든,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걷는 사람이든 마스크를 끼고 있다. 지난 2년은 어색한 것이 당연한 것이 되는 시간이었다. 각자의 사정은 다 다를 테지만, 분명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비하거나 수습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오랜만에 들른 동네 카페의 출입문에는 이런 메모가 붙어 있었다. “안정되면 돌아오겠습니다.” 누군가 뭔가가 시작되길 바랄 때, 또 다른 누군가는 뭔가가 끝나기를 바란다.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월요일 오전, 통로 쪽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는 동료에게 농담으로 물었다. “뭐 기다리는 거 있어?” 동료가 “주말?”이라고 대답해 크게 웃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기실 택배였으나 속으로는 아마 주말을 더 간절히 기다렸을지 모른다. 몇 달째 몸담았던 프로젝트가 무사히 끝났을 때는 묘한 해방감이 들었는데,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음을 온몸이 증명하고 있었다.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지만, 기다림이 보상받은 느낌 덕분에 종일 설렜다.

기다림이야말로 살면서 누구나 오랫동안 묵묵히 해온 일이 아닐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무의식중에 늘 하고 있던 일 말이다. 3월, 개학을 했고 대선이 있었다. 그사이 누군가는 신입생이 됐고 대통령 당선인이 수락 연설을 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순리처럼 찾아오는 일도 있지만, 기다림의 결과에 따라 환호하거나 낙담하는 사람도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기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간에 기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도착하기를, 연인이 생기기를, 가족이 건강을 회복하기를,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그래서 누구는 봄에도 겨울을 살고 한여름에도 봄을 잊지 못한다.

뭘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내처 기다렸던 시절이 있었다. 기다리는 대상은 분명한데 그것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봄에도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는 빠른 사람일까, 느린 사람일까. 대비하는 사람일까, 수습하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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