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역사관

임지현 서강대 교수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의 행보가 연일 화제다. 비탄에 빠진 국민을 격려하며 압도적인 러시아 침략군에 맞선 그는 세계 언론에서 저항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거인 골리앗을 때려눕힌 소년 다윗의 기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

임지현 서강대 교수

영국, 미국, 독일, 폴란드, 캐나다, 이스라엘 등 주요 국가들의 의회에 생중계된 그의 애국적 화상 연설은 큰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의 연설은 여기저기서 민족주의의 귀환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지난 20일 일요일 이스라엘 크네세트에서 있은 그의 화상 연설은 적지 않은 뒷말을 낳았다. ‘유대계’ 우크라이나인 대통령이라는 점 때문에 더 많은 기대와 관심이 쏠렸지만, 그의 연설에서 드러난 역사관은 많은 의구심을 낳았다. 그의 역사관은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에서 덜미가 잡혔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히틀러의 유대인 절멸 정책인 ‘최종해결책’을 공언했다고 주장했지만, 지나친 과장이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토적 야욕을 숨기지 않고 또 그 야욕을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노사이드라는 비난은 지나쳤다.

젤렌스키의 연설에서 드러난 더 큰 문제는 나치 점령기에 우크라이나인들이 유대인들을 구했다는 그의 역사 인식이다. 2차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은 약 150만명에 달한다. 현지 사정에 밝은 우크라이나인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짧은 점령 기간에 이토록 큰 규모의 학살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유대인 이웃을 구한 우크라이나인도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차라리 예외적이었다. 방관자이거나 나치의 공범자로 학살에 참여한 경우가 더 많았다.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데미아니욱 재판에서 보듯이, 죽음의 수용소에 경비병으로 동원되어 잔학행위를 일삼은 우크라이나인도 적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홀로코스트의 공범자적 과거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일고 있는데, 정작 유대계 대통령 젤렌스키의 역사관은 아쉽다.

국제무대에서 대통령의 역사관은 ‘국뽕’의 자부심이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를 성찰할 때 더 빛난다. 독일의 전임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그 모범이다. 메르켈의 역사관에는 동독에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는 자부심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부끄러움이 앞섰다. 덕분에 시리아 난민 문제 등에 대해 보수당 정치가 메르켈에게 보인 보편적 감수성은 어느 좌파 정치가보다 윤리적이었다.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성찰을 자학사관이라 비판하고, 식민주의적 학살과 인권유린에 대해 부정론으로 일관한 일본의 전임 총리 아베 신조의 역사관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국뽕의 민족주의적 자부심에 취한 정치지도자의 역사관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베는 온몸으로 증거한다.

21세기 한국 대통령의 역사관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자부심이 자리를 바꾸어가며 양극의 국뽕으로 흘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처럼 그 자부심이 지나쳐서 국정교과서 제도를 부활시켜 대통령의 역사관을 강요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프로젝트는 무산됐지만, 당시 여야 합의로 국회에 구성된 ‘동북아 역사 왜곡 대책 특별위원회’는 역사가들의 고대 강역 논쟁에 대해 정치가인 국회의원들이 판결을 내리는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 가야사 연구를 지원해서 영호남의 지역 갈등을 극복하겠다는 뜬금없는 정책으로 역사 인식의 빈곤을 드러냈다. 죽창가와 토착 왜구 등의 원색적 용어를 친일 몰이에 동원한 희대의 기회주의자 김원웅에게 ‘광복형’의 칭호를 붙이고 갈채를 보낸 문재인 정권의 역사관은 순진한 게 아니라 저급했다.

물론 누구나 다 나름대로 역사를 해석하고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고집할 수 있다. 대통령도 그렇다. 그러나 대통령의 권한으로 역사해석에 개입한다면 그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고대 가야사 연구를 지원해서 영호남 지역 갈등을 극복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께 나는 “청와대 주인은 역사에서 손떼라”고 고언했다. 윤석열 당선인께 드릴 말씀도 다르지 않다. 역사정책은 무정책이 상책이다.

궁금한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역사정책이 아니라 당선인의 역사관이다. 산업화든 민주화든 국뽕의 자부심이 아니라 현대사의 그늘을 성찰할 수 있는 대통령의 역사관은 아직 기대 난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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