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당초 ‘국민 눈높이’란 없다

이명희 사회에디터

새해가 시작된 지 넉 달째 접어들었을 뿐인데 숱한 일들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전쟁 발발, 대통령선거, 촛불로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과 수사를 맡았던 대통령 당선인 간 만남, 장애인 이동권 투쟁,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추진….

이명희 사회에디터

이명희 사회에디터

이 와중에 지긋지긋한 거리 두기가 끝났다. 일상회복을 기대하면서도 당장은 장관 후보자의 ‘아빠 찬스’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늘 그렇지만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마땅하고 당연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 ‘근거 없는 의혹 제기’에 몰두하는 ‘외계인’ 탓이 아니다.

일단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을 두고 윤석열 당선인 측과 국민의힘은 ‘국민 눈높이’에 맞는지 살피겠다고 했다. 단지 대학 입학과 병역에 특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인데 눈높이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정치권에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습관처럼 거론하는 ‘국민 눈높이’ 발언은 묘하게 거슬린다. 진부하기도 한 이 말에는 애당초 국민과 ‘저들’의 눈높이가 다르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언뜻 국민의 뜻을 받드는 것 같지만, 별문제 없는데 트집을 잡으니 퇴로 마련을 위해 ‘국민 눈높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국민을 속이는 언사다.

어쨌든 문제는 정 후보자 자녀들이 그가 경북대병원장 등으로 있을 때 경북대 의대에 편입학하면서 ‘아빠 찬스’를 썼느냐는 것이다. 의혹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아버지가 두 자녀의 ‘스펙 쌓기’를 위해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논문 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에 도움을 줬나? 둘째, 아버지가 병원 부원장·원장으로 있는 의대에 자녀들이 면접을 보고 편입하는 게 공정했나? 추가로 현역 판정을 받았다가 척추 질환으로 4급 보충역 판정을 받은 정 후보자 아들의 병역 문제까지 제기된 상황이다.

사실 정 후보자의 딸, 아들이 연이어 그가 재직하는 의대에 편입한 것을 두고 국민과 언론이 의혹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래 정시로 입학하기보다 편입이 더 어렵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니 말이다. 그래도 공정하게만 선발한다면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편입용 스펙을 쌓는 데 쓰인 봉사활동과 논문 실적이 석연치 않다. 여기에 시험을 치르는 대신 심사위원 재량으로 뽑는 평가에서 심사위원이 병원 주요 간부인 지원자 아버지와 친분이 있다면 의심은 더 짙어진다. 따져보니 구술평가 등에서 두 자녀에게 높은 점수를 준 심사위원들은 정 후보자와 동문이거나 논문 공저자라고 한다. 그의 해명대로라면 함께 논문까지 쓴 동료 교수들이 정 후보자 자녀임을 몰랐다는 건데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도 정 후보자는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두 자녀의 의대 편입과 아들 병역 4급 판정 관련 의혹을 모두 부인하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윤 당선인 측은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소명할 시간은 국회 인사청문회”라며 공세에 차단막을 치고 있다.

왠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정 후보자의 뻔한 해명을 들으면서 ‘조국 사태’가 떠오르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대처 방식도 그때와 똑 닮았다. 결말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 아마도 이렇게 지독한 예고편은 또 없을 것이다. 자, 질문을 던져보자. 조국 사태를 ‘내로남불’이라며 맹렬히 비판했던 국민의힘과 조국 일가를 수사한 윤 당선인이 보기에 정 후보자 경우는 ‘조국과는 다르다’는 것인가. 그리고 조국 전 장관을 옹호했던 더불어민주당은 이제는 ‘정호영은 다르다’는 것인가. 서로 맞고함을 치고 있는 양당의 얘기는 옮기지 않으련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 자식의 이익을 위해 공정의 가치를 훼손하는 데 나서던 ‘잘난 부모’들의 행태를 바라보는 것은 씁쓸하다. 저들은 자신이나 동료의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고 고소득 일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알음알음 ‘스펙 품앗이’를 하면서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 나름의 성공을 거두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연일 터져 나오는 장관 후보자들의 자녀 관련 의혹에 수험생과 취업준비생들이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분노하고 욕하는 것만으로는 저들의 논리가 받아들여지는 이 사회의 토양을 바꿀 수 없다는 데 있다. 사실 ‘용인될 수 없는 불공정’을 증명해내는 것 또한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정 후보자 말대로 위법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관 노릇 할 생각은 접는 게 맞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국민 눈높이는 애당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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