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정초석과 삼전도비

이광표 서원대 교수
한국은행 본관 정초석과 안내판

한국은행 본관 정초석과 안내판

지난해 9월, 한국은행 본관(사적)의 정문 옆에 안내판 하나가 설치되었다. 안내판의 내용은 이렇다. “이 머릿돌(정초석)은 일제가 침략을 가속화하던 1909년 7월11일 설치되었다. 定礎라는 글씨는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쓴 것이다. 隆熙三年七月十一日은 광복 이후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나,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머릿돌은 일제 침탈의 흔적이지만, 남겨 둠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흔히 문화재 안내판이라고 하면 해당 문화재의 내력과 특징, 가치 등을 소개한다. 그런데 이것은 좀 이례적이다. 그 자리에 보존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안내판이기 때문이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2020년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의 문화재청 국정감사. 한국은행 본관 정초석의 글씨를 이토가 썼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그 처리 방안을 놓고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아니, 침략 원흉 이토의 글씨가 어떻게 대한민국 한국은행 건물에 새겨져 있나.” “이런 사실도 몰랐단 말인가. 당장 철거해야 한다.” 당시 세간의 관심은 이토 글씨의 정초석을 철거할 것인지 여부였다. 그런데 이토의 글씨라는 사실은 그에 앞서 수년 전에 알려진 내용이었다. 당시 국정감사에서 좀 더 명확한 증거가 제시된 것이었고, “그동안 문화재청과 한국은행이 뭐했느냐”는 비판도 나왔다.

정초석의 처리를 두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현재대로 존치하고 그 앞에 안내판을 설치하자는 의견, 이토가 쓴 정초 글씨를 얇은 돌로 덮어버리자는 의견, 정초석을 떼어내고 박물관 등으로 옮겨 전시하자는 의견 등. 각각의 의견은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논란과 논의 끝에 정초석을 그대로 두되 바로 앞에 안내판을 설치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그렇게 해서 1년 뒤 정초석 안내판이 설치된 것이다.

누군가는 “침략의 원흉 이토가 쓴 글씨인데 그것을 어떻게 보존할 수 있느냐”고 화를 내기도 한다. 이 같은 생각은 일제 침략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뿌리가 닿아있다. 그런데 이토 글씨의 정초석을 치우거나 가려 놓으면 어떻게 될까.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곳에 이토의 정초석이 있었다는 사실은 희미해질 것이다. 철거한 자리에 안내판을 세워놓았다고 해도 실물이 사라졌기에 침략의 흔적이 현장감 있게 다가오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비(三田渡碑)에 관한 얘기다. 이 석비는 1639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승전을 자랑하기 위해 한강 나루터 삼전도에 세운 것이다. 1895년 고종은 “굴욕적인 비를 보고 싶지 않다”면서 한강에 빠뜨렸다. 그러나 1913년 일제가 이 비를 건져 올렸다. 일부러 한국인을 욕보이기 위함이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지역 주민들은 같은 이유로 이 삼전도비를 땅속에 묻었다. 하지만 1963년 홍수 때 비석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물에 빠뜨리고 땅에 묻었지만 계속 우리 앞에 나타난 삼전도비. 상처는 감춘다고 해서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외려 정면으로 응시할 때 치유가 가능한 것이다.

한국은행 본관은 1907년 착공해 1912년 조선은행 본점 건물로 준공됐다. 광복 후 1950년 6월 한국은행이 창립하면서 대한민국 중앙은행 한국은행의 건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한국은행 본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경제 침략의 대표적 상흔이다. 이토의 정초석이 남아 있을 때 우리는 그 뼈아픔을 더욱 절절하고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요즘 정초석 앞 화단에 철쭉이 피었다. 낭만적인 철쭉과 침략의 흔적 정초석. 그 대비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정초석 없이 꽃만 홀로 피었다면 어떠할까. 건물에 남아 있는 침략의 상처를 잊어버린 채 봄꽃의 아름다움만 감상하고 지나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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