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가지보다 다채로운 당신의 팔레트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나는 ‘ESTP’가 되기로 선택했다. ‘MBTI’ 같은 심리 테스트를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젠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MBTI를 모르면 자기소개나 아이스브레이킹이 완성되지 않는다. 단순히 재미나 편의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10대와 20대 대상 교육 사업에서 MBTI 콘텐츠가 없으면 소구력이 급격히 낮아진다. 일을 위해서라도 공부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다행히 ESTP가 되기 위해 번거로운 테스트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실제 나의 성격이 무엇인지보다,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나의 일상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향적이고 고민이 적고 냉소적이고 하루살이처럼 사는 인생을 ESTP로 요약했고, 듣는 이들은 적당히 공감했다. 구구절절 나를 설명하는 것보다 깔끔해서 편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소개가 필요한 자리에 갔을 때 나이, 학교, 직업 따위의 전통적 클리셰가 빠지지 않았다. 이후 전개도 뻔했다. 서로의 나이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벌어지는 말투의 변화, 학교나 직업의 이름만 듣고 바뀌는 태도, 남성은 어때야 하고 여성은 어때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 회식 자리만 가면 설명해야 하는 연애사와 결혼관까지. 불필요한 정보가 오가는 대화가 익숙했다.

반면 MBTI라는 신종 소개법은 순기능이 많았다. 4가지 유형을 하나하나 설명하면 적당히 시간이 흘러갔고, 자연스레 사람들은 서로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매너를 체득하게 된다. 같은 성향을 찾고자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이었다.

대화의 본질은 공감과 존중이니깐. MBTI의 과학적 완성도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본인의 유별나거나 평범한 모습 그 자체로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 듬뿍 투영되는 듯하다. MBTI의 대중적 인기에도 특별히 우수하거나 부정적으로 낙인찍히는 유형이 드문 이유 역시 위계를 나누기보다는 동질성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자기소개의 표준이 달라지는 만큼,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개개인의 바람이 총화되어야 할 정책, 정치는 아직도 존중을 모르는 듯하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는 상식적인 내용의 차별금지법은 여전히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구조적인 성차별 없이 살아가기 위해 출발한 여성 정책은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다수이자 주류인 비장애인 남성이 장애인의 작은 외침조차 폄하하고 혐오몰이를 하고 있다. 나이, 학교, 직업 등으로 위계, 갈라치기, 혐오를 양산하던 지난 시절의 습성이 그대로 케케묵고 있다.

무지개는 사실 7가지 색이 아니라고 한다. 총천연색에 이름을 부여하고, 인식하며 나아가 존중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 믿는다. 2가지의 성별, 4가지 혈액형, 몇개의 대학으로 구분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겨우 도달한 16가지 색깔을 보다 다채롭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회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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