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와 한 번뿐인 삶

백승찬 문화부 차장
마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2>의 한 장면

마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2>의 한 장면

지난 주말 찾은 극장은 모처럼 관객으로 붐볐다. 팝콘을 사려는 사람들 줄이 20~30m는 늘어서 있어 ‘저러다가 상영 시간에 늦겠다’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어린이날 징검다리 연휴, 팝콘 취식 허용에다 엔데믹 분위기까지 겹쳐 생긴 일이다. 물론 핵심은 콘텐츠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백승찬 문화부 차장

지난 4일 개봉한 마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이하 ‘닥터 스트레인지2’)는 1주일 만에 381만 관객을 모았다. 관객 755만명을 모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된 또 다른 마블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이후 최고 성적이다.

<닥터 스트레인지2>는 2016년 나온 영화의 속편이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4기에 속한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멀티버스(다중우주)를 이동할 수 있는 소녀 아메리카 차베즈를 만나고, 차베즈의 능력을 빼앗으려는 악당을 물리치려는 과정을 담았다. 간략한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 <닥터 스트레인지2>의 핵심 키워드는 멀티버스다.

<닥터 스트레인지2>는 마블 영화로서 준수한 재미를 안겨주었다. 젊은 시절 전설적인 공포영화 <이블 데드> 시리즈를 만든 샘 레이미의 특징인, 무시무시하면서 어딘지 우스꽝스러운 B급영화 감성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적절한 시너지 효과를 냈다. 설정과 줄거리가 어색하거나 억지스럽지도 않았다. MCU 다른 슈퍼히어로들의 카메오 출연도 팬들에겐 흥미 요소였다.

다만 내겐 이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맥없이 느껴졌다. 엄청나게 강력한 악당이 주인공들을 추격하는데도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고난 끝에 살아남으리라고 짐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을 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기초 설정인 멀티버스였다.

멀티버스는 일부 현대 물리학자들도 수긍하는 아이디어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는 무수히 많은 우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우주에 분신을 갖고 있다”는 이론이다. MCU의 창작자들은 현대 물리학의 추상적 아이디어를 슈퍼히어로의 부활을 위해 활용했다. 멀티버스를 도입하면 악당과 싸우다 장렬히 죽은 슈퍼히어로를 다시 등장시킬 수 있다.

난 영화를 보는 내내 ‘닥터 스트레인지가 악당에게 죽는다 해도 다른 멀티버스에서는 또 다른 닥터 스트레인지가 살아간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게 MCU식 멀티버스의 기본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판타지나 SF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삶, 영원히 이어지는 삶을 종종 다룬다. 그런 삶은 대체로 끔찍하게 그려진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주인공인 기상캐스터 필은 지역축제에 취재 왔다가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에 갇힌다. 처음에는 방탕하게 하루를 보내던 그는 생의 무의미를 견디지 못해 갖가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깨어나 더욱 괴로워한다. 아이작 아지모프의 단편 <바이센테니얼 맨>에는 인간이 되고 싶은 로봇이 나온다. 창의성, 사적 소유, 사랑 등의 능력으로 자신이 인간과 가까워졌음을 증명하던 로봇은 결국 영생을 버리고 조금씩 쇠약해지다 죽는 과정을 택한 뒤에야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삶은 한 번뿐이며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끝난다. 예외는 없다. 판타지와 SF의 ‘영생’에 대한 사고실험들은 유일하고 유한한 삶이 가치 있다고 강조한다. <닥터 스트레인지2>와 MCU의 멀티버스 설정은 이를 거스른다.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닥터 스트레인지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그들은 악당과 싸우다 이기거나 지더라도 다른 멀티버스에서 영원히 살아남는다. 이는 인기 캐릭터를 오랫동안 등장시켜 팬을 흥분시키고 그들의 지출을 유도하려는 대중문화 산업의 전략일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2> 말미에서 스트레인지의 동료 웡이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가끔 나의 다른 삶이 궁금할 때도 있어. 그래도 지금 삶에 감사하며 살지. 그 고난까지도.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영화의 등장인물이 영화의 허점을 찔렀다.

한 번뿐인 오늘에 충실하고 감사하기. 그렇게 내일도 또 다른 하루를 쌓아가기. 그러다가 다가오는 마지막 날을 가만히 맞이하기. 우주의 일부로 돌아가기. 그런 삶이면 한 번뿐이라도 충분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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