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책상’에서 ‘좌식 책상’으로

백승찬 문화부 차장

영화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PC)이란 표현을 처음 들은 건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1998)에서였다. 음흉한 사립탐정 팻은 주인공 테드로부터 고교시절 여자친구 메리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메리가 마음에 든 팻은 직접 그녀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는다. 팻은 메리의 관심사를 미리 알아낸 후 우연을 가장해 대화 기회를 만든다. 팻이 “전 저능아(retards)하고 일해요”라고 말하자, 지적장애인 오빠가 있는 메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politically incorrect) 표현 같은데요”라고 답한다. 팻은 “내가 누구와 일하든 참견할 사람은 없어요”라고 말하며 얼버무린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백승찬 문화부 차장

이른바 ‘화장실 유머’로 가득한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보긴 어렵다. 옛 여자친구를 찾기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해 뒷조사를 한다는 설정부터 미심쩍다. 당시에나 요즘이나 이 영화는 재밌지만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하긴 어려운 ‘길티 플레저’에 가깝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시니어 이어>는 ‘정치적 올바름’이 미국 사회의 표현 양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코믹하게 보여준다. 2002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스테프는 치어리딩 팀의 캡틴이다. 스테프는 고난도 동작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져 20년이 지난 2022년 깨어난다. 20년 전의 문화·언어적 감성을 가진 스테프가 20년 후의 세상에서 겪는 고충이 영화의 핵심이다. 스테프는 이제 모교의 교장이 된 옛 친구 마사와 대화한다. 스테프는 자기가 사고당하는 영상이 “인터넷에서 바이럴됐다”는 얘기를 듣고 “나 완전 ‘애자’같이 나왔는데”라며 당황한다. 마사는 “이제 그런 말 쓰면 안 돼. 실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까”라고 설명해준다. 스테프가 “게이 같다”고 말하자, 마사는 다시 “그 말은 실제로 동성애자인 사람을 가리킬 때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의미로만 써야 한다”고 답한다.

말은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게 당연

20년간 고교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과거엔 치어리딩 캡틴이 ‘인싸’였지만, 이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플루언서가 ‘인싸’다. 인플루언서가 치어리딩을 ‘반페미니즘적’이라고 비판하는 바람에, 치어리딩은 인기가 없다. 치어리딩 팀이 외치는 구호는 학교 운동부 응원이 아니라 “거북이들이 플라스틱 빨대 먹고 질식해 죽고 있어”다. 캡틴 선발은 불필요한 경쟁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폐지되고, 모두가 캡틴이다.

스테프는 시대 변화에 당황하면서도 차츰 적응한다. 동의 없는 성관계의 문제를 말하는 ‘노 민스 노’(No means no) 메시지를 전하면서 섹시 댄스를 추는 식으로 새 시대와 옛 감성을 절충한다.

미국에서도 PC 문제가 논쟁 없이 부드럽게 해결된 건 아니다. PC가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며, 독선적인 검열관의 행태를 떠오르게 한다는 시각이 여전하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조는 계급 등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눈감게 한다는 지적이 있다.

한마디로 “무서워서 말도 마음대로 못하겠다”는 것이 불만의 요지다. 혼잣말이 아닌 다음에야 모든 말은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마음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의 범위가 과거보다 조금 늘어났으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권력 차이를 한번 더 생각해보자는 것이 PC 논쟁의 취지다. 평범한 시민이 최고 권력자에게 ‘독재자’라고 부른다면 정당한 저항일 수 있지만, 최고 권력자가 그 시민에게 ‘불순분자’라고 부른다면 부당한 탄압이다. 지위, 계급, 정체성 등 여러 면의 소수자가 부적절한 말 때문에 상처받고 실질적인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기에 이런 면에 유의하자는 것이다.

어떤 말은 용법 싸고 논의 필요성

소설가 은희경은 27년 만에 100쇄를 찍은 <새의 선물> 개정판을 펴내며 장애나 여성 비하 표현을 수정했다고 한다. 그는 “고쳐야 할 게 보일 때마다 좋았다. 1990년대에는 이런 말을 타인에게 함부로 했구나, 사회가 조금 좋아져서 이런 걸 바꿀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앉은뱅이 책상’을 ‘좌식 책상’으로 바꿨다고, ○○녀나 ‘애자’ 같은 표현을 쓰지 않는다고 소설이 재미없거나 말문이 막히는 건 아니다. 다만 다수가 유동적으로 사용해온 말을 하루아침에 금지하긴 어려우며, 어떤 말은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음의 경계에 있기에 그 용법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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