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케이크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영상을 재생하자마자 정말 맛있어 보이는 햄버거가 보인다. 끝내주는 먹방이나 레시피 소개를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조리복을 입은 남자가 나와 씩 웃고는 긴 칼로 햄버거를 자른다. ‘폭신.’ 그것은 햄버거가 아니라 케이크였다. 내가 잠시 당황하고 있는 사이 남자는 햄버거가 놓인 접시를 자른다. ‘폭신.’ 접시도 케이크였다. 내가 혼란에 빠진 사이 남자는 무사처럼 햄버거 접시를 올려둔 책상을 반으로 잘랐다. ‘폭신.’ 책상도 케이크였다. 무섭다. 이제 남은 건 남자가 자신을 칼로 갈라 케이크였음을 증명하는 것뿐이기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다양한 사물로 정교하게 위장한 케이크를 보여주는 ‘극사실주의 케이크 비디오’는 ‘알고 보니 케이크가 아니었다’ 하는 흥미로운 반전과, 무엇이든 썰어버리는 시각적 만족을 이유로 3년 전부터 각종 영상 플랫폼에서 ‘만물케이크설’ 타이틀을 달고 유행하기 시작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아야 할 케이크가 변기, 베개, 재봉틀, 운동화 등 도저히 음식이라고 상상하기도 싫은 다양한 사물들로 위장하고 있으니 ‘폭신’ 자르는 영상에 몇 번 당하고 나면 어떤 물건을 보더라도 저절로 ‘이거 케이크일지 몰라’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이즈 잇 케이크>는 ‘Cake or Fake’ 비디오에 경연의 형태를 가미한 콘텐츠다. 극사실주의 케이크의 명인들은 쇼가 제시한 사물과 똑같은 형태의 케이크를 만든다. 진행자가 네 개의 진짜 물건 사이에 명인이 만든 케이크를 숨기면 심사위원들은 20초 동안 눈으로만 진짜와 가짜를 판단한다. 만약 심사위원들이 가짜를 가려내지 못하면 명인은 상금을 가져간다. 쇼를 다 보고 나면 두 가지는 확실히 깨닫게 된다. 하나는 이제 케이크는 완전히 ‘거짓’의 대유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케이크 한 판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파티셰의 노동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다.

‘먹을 걸로 장난치지 마라.’ 게임기 콘솔 모양의 케이크를 칼로 써는 영상에 누군가 이렇게 댓글을 남겨놓았다. 수많은 가짜 케이크 영상을 보면서 나도 우려했던 부분이지만 <이즈 잇 케이크>를 보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조금 덜 하게 됐다.

쇼에 참가한 파티셰들의 얼굴엔 장난기가 없다. 반죽을 하고, 시트를 굽고, 크림을 치고, 모양을 만드는 여덟 시간 동안 이들은 완벽한 모양과 맛을 위해 온몸의 통증과 경련을 견딘다. 그런 노고를 주변 모두 생생하게 본 탓인지 만든 케이크가 가짜임이 판명되어도 다 같이 한자리에 모여 맛을 음미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엔 농담을 거두고 만든 이의 정성과 노력을 비추며 ‘먹을 걸로 장난치지 않는’ 상식적인 쇼인 셈이다.

케이크를 만드는 게 직업인 노동자가 작정하고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 40일. 임종린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 지회장의 단식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 오랜 시간 수많은 활동가와 노동자들이 노동의 가치는 더 이상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아님을 이끌어냈지만 법과 인식 그리고 현실 사이엔 언제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는 걸 느낀다. 그가 6년에 걸친 투쟁으로 쟁취하고 싶은 것이 고작 ‘월 6회 이상 휴무’ ‘점심시간 1시간 보장’과 같은 상식선의 문제란 걸 알고 나면 과연 불매 정도로 힘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스스로의 무력함에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한다.

굶으면 죽는다. 하지만 살기 위해 굶는다. 그의 단식은 어쩌면 이른 새벽 출근하는 제빵 기사들에게 조식 식대로 고작 500원치 포인트를 주는 회사가 종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버이날엔 제과점 쇼케이스에 놓인 수많은 케이크를 보며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는 대신 먹을 것을 만들어 파는 회사가 외면한 생을 건 투쟁을 떠올렸다. ‘이 케이크는 과연 진짜일까요?’ 임종린의 일이 곧 나의 일임을 아는 노동자들이 칼을 들고 달려온다. 케이크를 가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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