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희망과 변화의 뿌리내림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 교수

2017년 5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인천공항을 찾았다. 그곳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선언이 있었다. 그러나 연출된 감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으로 제동을 걸면서 개혁은 포기되었다. 누군가는 공공기관 자회사인 용역업체로 소속만 바뀌었다. 누군가는 끝내 민간위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기간제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경우도 처우 개선은 미미했고 전환 규모도 박근혜 정부와 별 차이가 없었다. 공공부문이 모범 사용자 역할을 제대로 안 하면서 민간부문의 비정규직 사용도 제어되지 못했다. 현대제철 사례로 드러났듯 불법파견도 마다 않고 어떻게든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본은 아예 정부를 본떠 자회사 방식으로 간접고용을 확대했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 교수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 교수

결과적으로 전체 비정규직 비중은 문재인 정부에서 오히려 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까지 그 비율을 낮추겠다던 약속이 무색하게 한국은 OECD에서 비정규직을 가장 많이 쓰는 나라가 되었다.

비정규직 제로 선언이 있은 지 5년 후 다시 5월, 서울 지하철 구의역 김군 6주기를 추모하는 집회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파업을 결의했다. 상황이 나빠져서다. 윤석열 정부 인수위원회는 공공기관의 인력 효율화와 자회사 정리를 아예 국정과제로 내걸었다. 내년부터 공공기관에 기능점검이 상시화되고 재무위험을 평가받아 인력과 예산이 관리된다. 기재부가 인력 감축을 밀어붙이면서 민간위탁도 다시 확대될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되면 비정규직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규제 완화와 노동 유연화, 부자 감세까지 더해지면 비정규직을 양산해온 불평등 체제는 더욱 공고해지기 쉽다. 코로나19가 쏘아올린 공공성 가치에 대한 시민적 요구도 설 자리를 잃는다.

문재인 정부에서 사회개혁과 재정확장을 주저앉힌 일등공신인 기재부는 윤석열 정부에서는 아예 출범 초부터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 기재부는 총액인건비제도와 같은 통제 수단과 예산지침 등에 연계된 경영평가로 공공기관 운영에 요구되는 사전적 자율성을 제약하고 있다. 이는 OECD의 공기업 지배구조 가이드라인에도 배치되고 이미 국내 비준이 이루어진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도 위배될 소지가 있다. 공공부문 단체교섭 결과라도 기재부 예산지침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고집하면서 단체협약의 효력을 사실상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재부의 나라에서는 수많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급여가 평생 최저임금을 못 벗어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윤석열 정부에서 이 절망적인 현실이 개선되기를 바랄 수나 있을까.

혹시 문재인 정부가 정규직 전환을 위해 세운 용역업체들부터 윤석열 정부에 의해 구조조정 대상이 될지 모를 일이다. 이미 합의된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한국가스공사, 한전산업개발의 정규직 전환에도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 우리는 문재인 정책이라면 덮어놓고 무효로 만들어 촛불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퇴행적인 극우 정치를 마주하고 있다. 그 희생양이 될지 모를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도대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미국의 제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의 보수주의자였지만 뉴딜을 해체시키려던 당내 반발에 맞서 뉴딜이 열어놓은 전망을 존중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미국경제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윤석열 정부는 정녕 아이젠하워의 역사로부터 배울 것이 없을까.

결국 문제는 정치다. 문재인 정부가 사회개혁에 소극적이었던 것도,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맞서 싸우는 오늘의 현실도, 어쩌면 개혁을 추동할 만큼 정치적 압력을 생산해냈어야 할 진보정치가 아직 시민사회 내에서 그만큼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탓일 수 있다. 진보정당과 조직노동의 역량이 여태 미약한 탓일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불평등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변함없이 진보정치에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러니 이 답답함을 어찌 할까.

오늘은 지방선거 투표일이다. 장삼이사들의 자치, 그것은 기존의 지배질서가 관철되기 쉬운 공간이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의 뿌리이기에 사회개혁을 일구는 희망의 출발점도 될 수 있다. 이권 앞에서 하나 되는 기득권 정당들이 지방의회를 장악해왔지만, 동료의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더라도 오직 주민의 입장에서 올곧게 노동과 생태, 평등의 가치를 지켜낼 우리의 바른 일꾼들도 오늘 이 선거를 준비해 왔다. 그들이 내민 손을 오늘 우리가 잡아줄 수는 없을까. 우리의 힘이 부족해 당장 현실을 바꿔내지는 못하겠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희망과 변화의 뿌리내림을 시작해볼 수는 없을까. 파업을 결의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전국의 진보정당 후보들 모두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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