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다음

오수경 자유기고가

지방선거가 있던 날 냉장고 대청소를 했다. 오래 방치한 반찬과 식재료 중 상한 걸 버리는 게 1차 목표였다. 그중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도 있었다. 지난겨울 엄마가 담가준 열무김치는 시어 꼬부라졌지만 씻어서 참기름에 조물조물 무치니 제법 맛있는 반찬으로 재탄생했다. 냉장고 한쪽 구석에 있던 레몬 세 알도 구출하여 샐러드나 생수에 한 조각씩 넣기 편하게 작게 잘라 통에 담았다. 쾌적한 냉장고를 유지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편이지만,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다면 버리지 않는다. 음식과 식재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것이 그렇다. 문제는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오수경 자유기고가

온종일 냉장고 대청소를 비롯하여 밀린 집안일에 몰두한 이유는 지방선거 결과를 궁금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역대 최악의 ‘비호감’ 대선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지방선거를 치르려니 피로감이 몰려와서인지 선거 결과가 발표되는 뉴스는 꼴도 보기 싫었다. 선거는 예상대로 새 정부의 후광을 입은 여당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고 곳곳에서 탄식이 들렸다. 되지 말아야 할 몇몇 인물이 살아돌아온 것이 충격적이었지만 비교적 덤덤하게 선거 다음날을 맞이했다. 많은 이들이 이번 선거를 두고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만약 이번 선거를 실패라고 여긴다면 누구의 실패이며 무엇에 관한 실패일까?

진보와 보수를 떠나 선거는 ‘누구 때문에’ 지는 게 아니라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다. 냉장고에서 말라버린 당근이 그 옆의 양파 때문에 버려지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즉 선거는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과정인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고, 살려야 할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양당체제라는 개미지옥에서 그저 최악을 피하기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진보당은 구청장 1명을 포함해 21명의 기초의원을 탄생시켰다. 그중 13명이 여성이다. 성평등, 기후위기 등 동시대적 가치와 함께 지역 현안을 꼼꼼하게 챙긴 결과다. 당선인이 나오진 못했지만 녹색당의 선전도 기억할 만하다. 녹색당은 ‘녹색’이라는 이름에 맞는 비전을 제시하며 대안적 선거 활동을 했다. 그 결과 출마한 후보들이 골고루 5%에 근접한 지지율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서울 마포구에서는 첫 성소수자 구의원도 탄생했다. 비록 소소한 결과이지만 소위 중앙정치에서는 불가능한 다양성이 지역정치에서나마 실현된 게 반갑고 그 이유를 곰곰이 새길 필요가 있다.

진보 정당들의 약진과 선전을 보며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문장이 생각났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입니다.” 이 말을 적용해 본다면 기성 정치인들이 하고 있던 ‘무엇’은 무엇이었을까? 정치가 국민을 위하는 일이라고 떠들지만 사실 자신들의 자리와 정당의 이익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는가? 지역 일꾼을 자처했지만 정작 지역의 필요에는 관심 두지 않고 중앙정치에만 매몰되지는 않았는가? 이번 선거는 그 ‘무엇’들이 축적된 결과인 것이다. 그러니 만약 실패했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를 탓하기 전에 무엇에 관해 실패했고 왜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내지 못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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