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 소설가·번역가

전쟁이 이런 건지 알았다면 나는 여기 오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정말로 오지 않을 수는 있었을까. 소녀는 한숨을 쉰다.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죽어도 잊지 못할 거야, 그 소리들. ‘오도독오도독’ 소리.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사방에서 오도독오도독했어. 사람들 연골이 으스러지고 뼈마디가 뚝뚝 부러져나가는 소리였지. 사람의 두개골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쪼개져. 짐승의 울음 같은 처절한 비명들.1)

너는 어떻게 온 거야?

집에 가고 싶었어. 소년이 중얼거린다.

노량진에서 자전거포를 하는 사촌 형 집에 얹혀살면서 학교에 다녔어. 삼팔선이 막힌 뒤로는 방학 때도 북쪽에 있는 집으로 가지 못했어. 도시락도 거의 못 얻어먹었지. 한강 다리가 끊어지고 사촌 형 식구들은 피란을 떠났어. 우리 엄마가 맡긴 쌍가락지를 형수가 손가락에 끼고 있더라. 혼자 빈집에 남았는데, 폭격이 시작됐어.

엊그제 아침에는 굉장했지. 소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핀다. B29가 새카맣게 몰려와 퍼부었어. 겨우 삼십 분 남짓이었는데, 왜관의 약목 부근 강가에는 풀 한 포기도 남아 있지 않대.2)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무작정 집에 가려고 강을 건넜어. 그날 거리에서 죽은 사람들을 처음 봤어. 팔다리가 없거나 나무에 걸려 있기도 했어. 학교에 갔더니 군인들이 있었어. 북쪽 군인이 되면 집에 갈 수 있고 굶지도 않겠다 싶었지.

조국 통일이나 인민 해방 같은 건 생각도 안 했니?

소년은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뜬다. 우린 훈련을 받았어. 빨리 걷는 법과 정확하게 사람을 죽이는 법. 네가 아까 소리 이야기를 했나? 사람이 총알에 맞으면, 소리가 들려. 결코 잊을 수 없는 또렷한 소리. 세차게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는 것처럼 찰진 소리. 옆의 동료가 알싸한 흙먼지 속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지지.3) 하지만 곧 익숙해져. 죽음은 그저 성가신 것일 뿐이야.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죽는 건 점점 더 무서워져. 나는 너무너무 살고 싶어.

오늘 밤 환자들을 두고 후퇴한대. 소녀가 속삭인다. 또 미군 비행기가 날아와 한바탕 퍼부을 거야.

난 걸을 수 없어. 총알이 다리를 뚫고 지나갔어. 네가 붕대를 감아주었잖아. 소년은 소녀의 팔에 매달린다.

넌 걸을 수 있어, 일어나. 소녀는 소년을 뿌리치고 일어선다. 집으로 돌아가, 어서!

너는? 너는 집에 가지 않을 거야? 소녀는 고개를 젓는다. 나는 할 일이 있어. 다친 사람들을 돌봐줘야 해.

소년은 걷는 듯 기는 듯 어둠 속으로 움직인다. 소녀의 목소리가 뒤따라온다. 내 이름은 김명순이야, 기억해 둬. 소년은 이따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자리를 길잡이 삼아 북쪽으로 향한다. 밭에 남아 뒹구는 감자나 콩깍지를 줍고 오이와 참외를 서리해서 배를 채운다. 빈집을 뒤지기도 한다. 낮에는 숲속 깊이 들어가 나무를 끌어안고 잠이 든다. 기진맥진해 쓰러질 때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어나, 집으로 가.

달포 만에 산속 마을에 다다른다. 이제 더는 걸을 수 없어 외딴집에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주인은 어느 쪽 군인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쫓아낸다. 여기가 어딥니까. 소년이 묻는다. 고향 집에서 이삼십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비틀거리며 돌아 나오는데 키 큰 처녀 하나가 따라 나온다. 처녀는 소년을 움막에 숨기고 주먹밥을 갖다준다. 그리고 소년의 어머니에게 기별하러 간다. 소년은 짙고 무거운 잠의 늪으로 빠져든다. 멀리서 어머니가 소달구지를 끌고 산길로 올라온다. 손가락에서 쌍가락지가 반짝인다. 어머니 옆에는 누구인가. 김명순이다. 소년의 다친 다리에 붕대를 감아준 김명순이가 하얀 모자를 쓰고 웃고 있다.

1)<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2)<작은 ‘한국전쟁’들>, 강성현 3)<아연 소년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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