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 소설가·번역가

하늘과 땅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였다. 길이 아니라 허공을 걷는 듯했다. 시간의 흐름도 아리송했다. 몸이 날아갈 것 같아 웅크리고 앉을 때마다 얼마나 헤맸는지 기억하려 애썼다. 세 시간이 지났는지 석 달 열흘이 흘렀는지 아득하기만 했다.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여기가 어디인가. 에베레스트인가. 매킨리인가. 정상을 향해 오르는 중인가. 산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 폭풍 속에서 헤매는 자신이 사람인지 눈보라인지조차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 속에서 구원의 동아줄을 붙잡듯 목소리를 따라 걸었다. 눈앞에 뻥 뚫린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동굴 안은 좁고 어둡고 축축했다. 눈보라 치는 바깥이 아무리 위험해도 선뜻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사람들이 동굴 바닥에 모여 앉아 제각각 떠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누군가가 노래하듯 대답했다. 하늘에 해와 달이 두 개씩 뜨고 초목과 금수가 말을 하며 사람이 물으면 귀신이 답하는 혼란의 시대가 있었소. 천지왕의 아들 대별왕이 이승으로 건너와 해와 달을 하나씩 쏘아 떨어뜨리고, 송피가루를 뿌려 초목과 금수의 입을 막았소. 귀신과 인간을 저울로 달아 백 근이 넘는 것은 인간으로, 안 되는 것은 귀신으로 보냈소.1) 세상을 정돈한 뒤 천지왕은 사람들이 하늘의 뜻을 잊지 않게 하려고 땅 위에도 하늘 궁전을 마련했소. 바로 여기, 천상천하의 영기가 모여든다는 할로영산이라오.

다들 왜 여기 모여 있나요?

우리는 배고픔에 쫓겨 왔소.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대답했다.

겨울이 지나 먹을 게 떨어져 큰 부자인 수명장자에게 쌀을 꾸러 갔소. 쌀에 흰 모래를 섞어 작은 말로 덜어주더니 되받을 때는 큰 말로 갚으라 했소.2) 갚지 못하니 머슴으로 부렸소. 검은 모래가 섞인 조밥만 먹으며 마소처럼 일하다가 배가 고파 산으로 달아났소. 집에 가봐야 배를 채울 게 없으니 뜯어먹고 잡아먹을 게 있는 산으로 온 것이오.

도대체 언제 적 일인가요? 사람이 물으면 사람도 답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시절의 이야긴가요.

맞아요. 갈색 두루마기를 입은 여인네가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이 둘로 찢어졌어요. 밤에는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는 사람을 반동이라 부르며 죽이고, 낮에는 순경들이 스리쿼터를 타고 와 검속을 했어요. 남정네들은 낮이나 밤이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어요. 남편 숨은 곳을 대라고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일을 당하기도 했어요. 솥하고 이불을 지고 동굴로 들어갔지요. 연기 안 나는 청미래덩굴로 불을 때서 밥을 지었어요. 그해 겨울 군인들이 몰려와 마을에 남은 노인과 여자, 아이들에게 총을 쏘았어요. 해안도로 옆 옴팡밭에 사람 시체가 겹겹이 쌓였어요. 배가 고파 산에 들어왔다고 했나요? 우리는 목숨에 쫓겨 여기까지 왔어요.

“그 밭이서 죽은 사름들이 몽창몽창 썩어 거름되연 이듬해엔 감저(고구마)농사는 참 잘되어서. 감저가 목침 덩어리만씩 큼직큼직 해시니까.”3) 그래도 아무도 먹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사람 죽은 밭에서 난 거라고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세월이었어요.

이제는 사람이 물으면 기계까지 답하는 시절인데요.

아니요. 사람도 기계도 답하지 않았어요. 창백한 얼굴의 청년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돈에 쫓겨 스크린도어와 컨베이어 벨트와 프레스 앞으로 갔어요. 그리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어요. 우리가 왜 여기에 있나요? 우리는 사람인가요, 귀신인가요, 기계인가요?

등골이 오싹했다. 이제 동굴에서 나갑시다. 함께 산 아래로 가요. 큰소리로 외치며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눈보라 속에서 목소리가 뒤쫓아 왔다.

우리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려주오.

우리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그래야 우리가 산에서 내려갈 수 있어요.

1)<천지왕 본풀이>, 제주도 서사무가. 2)<제주신화>, 이석범. 3)<순이 삼촌>, 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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