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껌

네모 난 껌 하나 손에 쥐어도 세상의 작은 면적을 내 차지로 만든 듯한 시절이 있었다. 갑을 뜯고 포장지와 은박지를 벗긴 뒤 입에 넣으면, 아, 쫄깃하고 달콤한 향! 그 신문명은 아무리 씹어도 닳지도 않았다. 참새처럼 짹짹짹 씹다가 다음날까지 챙겨가야 할 보물인 듯 구석의 벽지나 문풍지에 몰래 붙여놓고 잠들기도 했다.

사촌 형제들과 모인 자리. 예전 시골 점방에서 껌 하나 살 동전도 없어, 생밀을 한 주먹 털어넣고 씹으면 작은 건더기가 남아 간장에 졸인 번데기 같은 그것을 껌처럼 씹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른바 단백질 복합체인 글루텐이란 성분이다. 이건 나도 해본 적이 있기에 아는 척하려는데 큰형님의 한마디에 말문을 닫아야 했다. 말 마라. 우리는 그 밀껌을 씹다씹다 색을 낸다고 크레용을 종류별로 함께 씹어 먹었다 아이가.

평창의 박지산 초입에는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산뽕나무의 알록달록한 열매가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나무는 애써 키운 제 열매를 땅바닥에도 등산객의 입에도 구별없이 정확하게 쏙쏙 집어넣는다. 무지무지 달콤한 뽕나무 열매. 표준말로는 오디라고 하지만 내 고향 거창에서는 ‘오돌개’라고 했다. 나는 오돌개라고 해야 옛날의 그 맛이 제대로 난다. 가지를 휘청 당기며 오돌개를 정신없이 따먹다 보면 어느새 손끝이 검붉게 물든다. 봉숭아로 물들인 듯 오돌개의 염색을 보다가 문득 회심의 용도가 떠올랐다. 몇 알 따서 손수건에 따로 챙겼다.

어디서 오는가. 고개를 무너뜨리겠다며 졸음이 자꾸 쳐들어온다. 운전대를 잡으면 더욱 그렇다. 자일리톨 껌을 얼른 단물이 빠지도록 조금 빨리 씹었다. 그리고 손수건에 보관했던 그 오돌개를 입에 털어넣었다. 크레용과 함께 씹은 형님의 밀껌처럼, 오돌개가 흰 껌을 우아하게 색칠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오돌개껌은 나의 예상을 간단히 빗나갔다. 껌은 뽕잎처럼 푸르렀다가 점점 뽕나무 껍질의 색감을 띠더니 이윽고 연한 쑥색으로 변해갔다. 어금니의 압력과 침의 위력이 보통이 아닌가 보다. 문득 더러 화공약품 냄새도 묻어났을 그 크레용껌을 씹던 어린 시절 형님의 표정을 그려보았다. 차마 직접 묻지는 못하겠지만, 형님누나들, 고춧가루 색의 빨간 크레용과 씹으면 밀껌은 분홍색이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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