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냉면

강원도 심산유곡의 어느 암자에 있는 해우소는 그 깊이가 하두 깊어서 힘 한번 주고 나서 반응을 기다리며 귀를 쫑긋해도 영 기척이 없다가 남은 근심의 덩어리를 모조리 다 짜내고 허리띠를 후련하게 졸라매며 엉성한 문을 빼꼼 열고 바깥으로 나오면, 그때서야 궁금해하던 그 야릇한 소리가 긴 침묵의 낭떠러지를 뚫고 비로소 올라온다고 한다.

최근 가뭄이 몹시 심하더니 곧바로 장마가 들이닥쳤다. 비는 오늘도 내렸다. 새로 이사 간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했더니 1층이었다. 사무실은 통유리창이었고 지면에 자리잡은 한해살이풀이 모처럼 비를 맞으며 고향의 안부를 확인한 뒤 한결 씩씩해진 모습이 훤히 보였다. 비는 무더기로 오지만 국수가락처럼 골고루 퍼져 내린다. 만약 떡진 수제비처럼 뭉쳐서 내린다면 우산이나 지붕을 뚫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참으로 다행하게도 비는 엉기지 않고 평행하게 내려 그 긴 침묵의 허공을 뚫은 뒤 이 바닥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하늘에서 힘주고 있다가 궁금하게 귀 기울이고 있을 이에게 신호하듯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소리. 츳, 츳, 츳.

점심은 필동면옥에서 하기로 했다. 비는 계속해서 주룩주룩 내렸다. 내리는 빗발을 면발로 맞바꾸며 닝닝한 물냉면을 먹는 맛이 괜찮았다. 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부드러운 면발이 콧등을 칠 기세로 덤벼들었다. 친구는 기후변화에 대해 몹시 걱정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한다. 앞으로 여름에 비가 줄창 내리고 그리고 엄청 덥다가 또 곧바로 추운 날씨가 되지 않겠어요? 이러다가 더운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문득 지난주 물폭탄에 바닥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아스팔트로 튕겨나온 자라 생각이 났다. 녀석은 제집을 무사히 찾아갔을까, 생각하며 젓가락을 놓았다.

충무로역 게이트에 지갑을 대었는데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무슨 덩어리처럼 턱, 가로막혔다. 뒤따르는 이가 변비환자처럼 짜증을 내려고 했다. 얼른 자리부터 비켜주었다. 아차, 점심값을 계산하면서 그냥 영수증과 함께 호주머니에 넣은 것이다. 다시 카드를 갔다 대자 비로소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기다렸던 그 상냥한 신호를 따라 띵띵한 덩어리 하나가 또 어떤 아득한 오후의 구멍 속으로 덜컹덜컹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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