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남편이 산에 가서 안 오면 마침내 죽을까 봐 걱정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여주인공 서래가 이렇게 말하자, 형사 해준은 의심한다. ‘마침내’라니. 서래는 외할아버지가 한국인 독립운동가인 중국인이다. 박찬욱 감독은 서래 역을 맡은 탕웨이의 한국어가 문장도 완벽하고 정확해서 더 독특했다고도 말했다. ‘마침내’라는 단어에 대한 이물감은 한국어 사용자만이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다. 만약 영어로 번역한다고 하면 그 어감과 문맥이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을 듯싶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한국어 문법으로 보아도 ‘마침내’가 틀린 사용은 아니다. 하지만 ‘마침내’는 문맥상 미심쩍다. 단어와 단어 사이, 부사와 부사 사이, 오히려 지나치게 문법에 맞는 올바른 문장은 평범하지 않고 어색하다. 우리의 일상에 사용되는 단어들, 언어들, 문장들은 문법에서 벗어나거나 오류투성이일 경우가 더 많다. 그게 바로 우리의 상투어 세계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세계는 그런 점에서, 늘 상투어와의 결별을 지향한다. 칸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박찬욱은 경험적이거나 일상적인 영역을 영화에 잘 담지 않는다. 관심사가 아닌 것이다. 박찬욱 감독 영화 속 인물이나 사건은 대개 비일상적이다. 음악이나 벽지, 테이블 같은 소도구들도 낯설다. 일상적이지 않다라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그건 곧 박찬욱의 영화 세계가 비일상과 상투어에 대한 긴장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뜻한다.

상투어는 사전적으로 “늘 써서 버릇이 되다시피 한 말”이다. 틀린 표현이라도 거듭 쓰다 보면 상투어가 된다. 상투어는 진부한 말이나 평범한 말과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진부한 말은 시대에 뒤떨어져 새롭지 않은 말이다. 낡은 표현인 셈이다. 진부한 말은 한때 멋진 표현이었을 경우가 많다. 눈동자가 호수 같아, 라는 표현처럼 말이다. 반면 평범한 말은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는 말이다. 눈에 띄지 않는 그래서 다른 것과 구별되지 않는 것, 그게 평범한 것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추앙’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문어체나 번역체에나 등장할 법한 사전 속 단어가 갑자기 등장인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상대 배역은 국어사전을 펼쳐, 추앙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본다. 일상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에 상투적으로 받아들이기도 이해하기도 어렵다. 낯선 음절로 다가와 의미가 궁금해진 것이다.

추앙은 영어로 표현하자면 리스펙트이다. 리스펙트, 힙합을 중심으로 한 한국 대중음악에서 얼마나 상투적으로 남용된 단어인가? 코미디를 비롯한 말장난의 밈 속에서 리스펙트는 그 원래의 의미나 가치에서 멀리 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다시 사전적으로 찾아보니 그건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언어 습관과 체계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고, 누군가를 진정으로 궁금해하면 상투적이고 평범한 말들이 모두 암호처럼 궁금해진다. 진정한 궁금증이란 그 사람의 말을 상투어로 얼렁뚱땅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남에 대한, 세상에 대한 이해가 무릇 상투적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우리가 쓰는 유행어들은 대개 상투어인 경우가 많다. 커뮤니티나 인터넷에 밈으로 떠도는 단어들도 상투어다. 문제는 차별어가 상투어가 될 때이다. 젠더 갈등, 인종 갈등에 인용되는 수많은 차별어들, 언론에서 제목에 달아 집중 조명하는 계층 간 차별 신조어들이 그렇다. 미디어가 좋아하는 이런 신조어들은 갈등과 분열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아예 구체적 개념으로 만들어 낸다. 벼락거지, 기생수 같은 말들은 그 연원에 대한 면밀한 검증도 없이, 사람들이 쓴다며 남용된다. 혐오어이며 차별어라는 염려도 곁들인다. 그러나 그런 걱정과 우려도 상투적이다. 전혀, 진심 어린 걱정을 담고 있지 않다.

개인의 다양성을 소수의 범주로 묶어 버리는 폭력적 규범화도 상투어로 이루어진다. ABO식 혈액형이 16개로 늘어난 MBTI에 대한 집착도 상투적이다. 무엇보다 정치와 선거에 활용되는 우리 사회 갈등이야말로 상투어이다. 상투어로 묶어 범주화하면 구체적 갈등은 표로 환산되는 집단적 이익 정도로 간소화된다. 세상을 바로 보고, 세상의 갈등을 진짜 해결하기 위해선 일단 상투어와 결별해야 한다. 기득권은 상투어를 활용해 혐오와 갈등을 지속시키고자 한다. 그게 이익이 되므로. 그러니 우리는 세상이 던져준 상투어가 아니라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 진짜 세상은 상투적이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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