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다”

조홍민 사회에디터

‘영혼 없는 공무원.’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인 2008년 1월3일 국정홍보처의 인수위원회 업무보고 때 등장한 이후 대중의 입길에 자주 오르내린 표현이다. 한 인수위원이 전 정부의 언론정책을 비판하자 김창호 당시 국정홍보처장이 “우리는 영혼 없는 공무원들”이라고 말하면서다. ‘위에서 하라면 할 수밖에 없으니 우린 아무 죄가 없다’는 자조(自嘲)나 다름없었다. 다음날 김 처장은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한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말을 인용했다며 “관료는 어느 정부에서나 그 정부의 철학에 따라 일할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파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조홍민 사회에디터

조홍민 사회에디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나타난 몇몇 장면을 지켜보면서 ‘영혼 없는 공무원’이란 말을 다시 소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통일부의 ‘탈북어민 북송 사건’이다. 최근 통일부는 3년 전 동료 선원 16명을 살해하고 탈출한 어민 2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낸 것은 ‘잘못된 결정’이라며 종전 자신들의 입장을 뒤집었다. 흉악범이긴 하지만 이들이 귀순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북으로 보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전 발표는 “국가안보실로부터 언론 브리핑 요구를 받았고 이후에 브리핑을 진행했다”며 문재인 청와대에 책임을 돌렸다. 한술 더 떠 며칠 뒤에는 송환 장면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까지 공개했다.

3년 전엔 당국의 조사와 감청 정보 등을 통해 이들 2명이 동료를 살해했고, 해경의 추격을 피해 사흘이나 도주하다가 붙잡힌 상황을 들어 ‘북한이탈주민법상 보호 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힌 게 바로 통일부였다. 당시 국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보수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자기부정’이나 다름없는 입장 번복을 해버렸다. 일단락된 문제를 끄집어내 ‘색깔론’을 덧씌워 현 정권의 정치적 이익을 챙기겠다는 심산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다. ‘법인세의 감세 효과’ 역시 정권에 따라 오락가락하고 있다. 엊그제 경향신문이 지난 21년간 기획재정부의 법인세 관련 ‘보도·설명자료’를 전수조사한 결과를 보면, 진보정권에서는 “법인세 감세 효과가 없다”로, 보수정권에서는 “있다”로 입장이 달랐다. 법인세 인하 효과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통계 자료가 미흡한 상황에서 정부 성향에 맞게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조세재정연구원장을 지낸 김유찬 홍익대 교수는 “기재부가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지 않고 이념적으로 정치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의 지위와 책임, 신분과 함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많은 공무원이 정치적 중립은 마땅히 지켜야 할 덕목이라고 인식하지만 선출직 장이나 정무직 고위 관료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권이 바뀌면 공무원 사회가 그에 맞게 재빨리 태세전환을 해야 하는 게 불문율처럼 지켜져왔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1항),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2항)는 헌법 7조의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 있다. 공무원이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란 헌법 조문은 어느 특정 정권이나 정치인을 위해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국민을 위한 봉사자로서 일을 해야지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 충성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깃들어 있다.

공무원의 신분과 중립성이 법률로 보장된다는 대목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책임질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게 돼 있다. 국가공무원법에는 성실·복종의 의무 등이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상관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부당한 명령까지 따르라는 뜻은 아니다. 잘못된 결정에 대해서는 “이건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재상 안영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경공)의 허물을 하루 세 번이나 지적(一日三過)했고, 송나라 고종 때 간관이었던 왕거정은 두려움 없이 간언해 부당함을 바로잡았다. 왕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나 다름없는 시절 목숨을 내놓고 부조리에 맞섰다. ‘영혼이 없다’는 치욕스러운 조롱을 이젠 그만 들을 때다. 지금은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다. 쓴소리할 줄 아는 공무원이 없다는 소리를 들어서 되겠는가. 아무런 소신 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정권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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