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분 언니의 식탁

김해자 시인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양승분 언니의 식탁

밤새 비 내린 아침

옥수수 거친 밑동마다

애기 손톱만 한 싹이 돋아났다

지가 잡초인 줄도 모르고, 금세 뽑혀질 지도 모르고

어쩌자고 막무가내로 얼굴 내밀었나

밤새 잠도 안 자고 안간힘을 썼겠지

푸른 심줄 투성이 저 징그러운 것들,

생각하니 눈물 난다

누구 하나 건드리지 않고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솟아오른 저 순한 새순 앞에

우리네 시끌벅적한 생애는 얼마나 엄살투성인가

내가 사람으로 불리기 전에도 잠시 왔다 가는

이승의 시간 이후에도 그저 그러하게

솟았다 스러져 갈 뿐인 네 앞에

너의 부지런한 침묵 앞에

이 순간 무릎 꿇어도 되겠는가

-시, ‘스스로 그러하게’, 김해자, 시집 <축제> 중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8월은 무성하다. 우거질 무(茂)에, 담을 성(盛), 풀도 우거지고 작물도 차고 넘친다. 여름에는 억센 풀만 잡고 삐죽한 데만 분지른다. 풀이 지나쳐서 바람길과 햇빛길을 완전히 막지만 않으면 곡식은 잘 자란다는 믿음으로. 작물도 풀의 일원이니까. 잠시만 움직여도 땀범벅 만드는 구부리는 동작을 그만두고 마실 나온 듯 밭 구경한다. 풀도 잡고 꽃도 볼 겸 심었던 금잔화와 백일홍과 분꽃과 안개꽃으로 눈이 호사한다. 보름 간격으로 네 차례, 땅에 두 알씩 여기저기 숨겨놓았던 옥수수 알들이 들쑥날쑥 올라오고 있다. 초딩 중딩 고딩처럼 키가 제각각이다. 이렇게 심으면 가을까지 몇 개씩 따먹을 수 있다. 물론 햇빛 싸움에서 안 지게 영역은 구분해 줘야 한다.

보름 전, 영동에서 농사짓는 후배가 옥수수 한 박스 보내왔길래 한솥 쪄서 양승분씨 집에 싸들고 갔다. 수염 달린 옥수수 한 자루에, 뜨거울 때 먹으라고 한 봉다리 가득 찐 옥수수까지 받아먹었으니 나도 맛보게 하고 싶어서다. 양승분씨는 듬뿍 주면서도 받는 사람 안 미안하게 한다. 별거 아닌 거 가져가도 기분 좋게 받는다. 언니네 식탁 앞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앉아 있다. 딸과 사위와 손자가 앉아 있기도 하고, 동생들 내외가 떠들썩하게 술 마셔가며 담소를 즐기기도 한다. 공사차 들른 사람이나 천안 시내에서 출퇴근 농사짓는 뒷집 아저씨나 농사가 너무 많아 밥때 거르기도 하는 반장님이 함께하는 식탁에서 나도 밥숟가락 들 때 많다.

“수저 하나 놓으면 되는디 그게 뭐라”면서 차리는 언니네 식탁에서 나는 양승분씨 식구다. 언니네 쌀은 물론 감자와 옥수수와 땅콩과 들깨와 고추가 여러 집으로 배달된다. 하다못해 미장원 가면서도 된장박이 해놓았던 깻잎 씻어 들기름과 들깻가루 살짝 넣어서 지져 가고 한번 맛보라고 옥수수도 쪄서 간다. 별게 아니어도 맛있게 먹어주니 그거라도 싸들고 간단다. 일흔 넘고부터 양승분씨는 병원과 친해지는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팔에 관절주사를 맞더니 요새는 무릎까지 맞는다. 올봄엔 밭일 하다 쇠꼬챙이에 찢겨서 손등을 열 바늘 꿰맸다. 손목까지 붕대를 감았는데 퉁퉁 부어올랐다. 조심스레 손등과 손가락을 만졌더니 엄청나게 뜨거웠다. 아직 건재한 어깨나 주무르다 울컥해서 뒤돌아섰다. 컵과 접시 몇뿐인 설거지한답시고 달아오른 눈자위를 식혔다. 아프단 말도 고생 고(苦)자도 꺼내지 않고 “그거라도 안 하면 뭐 할겨” 말하는 언니 앞에서 나는 자주 엄살을 잊는다. 그러고 보니 고(苦)도 풀 초 변이구나 생각할 뿐.

요새는 시도 때도 없이 비구름이 몰려온다. 초여름까지 목마르던 작물들이 쪽쪽 물 빨아 먹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오이가 통통해지고 하룻밤 사이에 고추도 빨개졌다. 단비 맞은 데다 잠시만 볕 들어도 넉넉하니 어디 작물만 호시절이겠나. 옥수수 밑에 쇠뜨기도, 호박과 고구마 줄기 사이에 바랭이와 명아주도 기세 좋게 올라온다. 지팡이로 써도 되겠다. 자라면서 흙 위로 튀어나온 옥수수 뿌리가 대지를 딛고 서 있다. 소 발굽 같기도 하다. 씩씩한 잎들 사이로 수염 긴 옥수수 어르신이 나를 내려다본다. 바로 앞 양승분씨 사래 긴 밭에서는 서리태와 들깨와 대파들이 시퍼렇게 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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