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서울의 자화상

김연식 전 그린피스 항해사

그린피스 환경감시선 아틱 선라이즈호를 타고 2018년 남극에 다녀왔다. 거친 파도로 악명 높은 드레이크 해협은 ‘천로역정’처럼 괴로웠지만, 일주일쯤 견디며 항해한 끝에 만난 남극은 상상 속 천국처럼 아름다웠다. 사방 맑은 하늘 아래 새하얀 빙산이 두둥실 떠다니고, 저만치 앞에서 펭귄과 고래, 물범이 노닐었다. 낭만적인 첫 장면이 전부는 아니었다. 남극은 금세 얼굴을 바꿔 강풍 블리자드를 뿜었고, 바다에는 크릴을 낚는 대형 어선들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진을 치고 있었다. 크릴을 어선에 빼앗긴 펭귄과 고래는 힘겹게 먹이를 찾아 헤매야 했다. 두 얼굴의 남극이었다.

김연식 전 그린피스 항해사

김연식 전 그린피스 항해사

그 남극을 서울 한복판 도심 쇼핑몰에 옮겨왔다. 그린피스 남극 사진전이 지난달 14일부터 31일까지 용산역 아이파크몰에서 열렸다. 콘크리트와 인공조명뿐인 상점 한가운데 걸린 새하얀 남극의 장면들은 무더위에 지친 시민들의 시선을 끌었다. 나도 사진을 감상하며 옛 기억에 빠져들었다. 사진 스무 장은 아름다운 풍경을 담았지만, 실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말하고 있었다.

첫 사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웅장하리만치 거대한 빙산이 푸른 바다에 둥실 떠 있다. 남극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덩어리는 쪼개지고 녹아내리다 지쳤는지 기우뚱 기울었다. 눈이 쌓이고 그 무게에 눌려 생긴 나이테 같은 적설층, 커다란 빙판에서 쪼개져 나와 생긴 울퉁불퉁한 표면은 산전수전 다 겪은 맹수의 상처 많은 피부를 닮았다. 빙산 윗부분은 새하얗고, 아랫부분은 바닷물에 닿아 시리게 푸르다. 종종 위쪽이 파란 빙산도 보인다. 아랫부분이 바닷물에 녹아 가벼워지면서 위아래가 뒤집힌 까닭이다. 커다란 빙산은 뒤집고 쪼개지기를 반복하다 물에 녹아 사라질 테다. 쓸쓸한 운명이다. 그 빙산 위에 아델리펭귄 한 무리가 올라앉아 있다. 먹이를 잡다 쉬는 모양이다. 펭귄들은 일정 거리를 두고 늘어섰다. 가까이 보면 삐뚤빼뚤하지만, 멀리서 전체를 보면 나름의 어떤 규칙이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다른 펭귄 사진을 찾아봤다. 수천 마리가 둥지 튼 펭귄 군락지를 파노라마로 오목하게 펼쳐놓은 사진이 보인다. 그런데 바로 앞에 놓인 간이 의자에 중년 남녀가 더위를 식히려는 듯 얼음 든 음료를 마시며 사진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다른 관람객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기만 기다리는데, 아무래도 마냥 앉아 있을 품새다. 하는 수 없이 멀찍이서 사진을 보았다. 그런데 유심히 보니 찜통더위에 시름 하는 서울시민 뒤로 기후위기를 겪는 남극 펭귄의 모습이 배경으로 겹쳐 어떤 교훈을 준다.

지금도 저기 남극 얼음이 녹아 사라지고 있다. 남극 해빙은 2017년 최저 면적을 기록한 이래 지난 5년 동안 우리나라 면적의 두 배에 달하는 얼음이 더 사라져 올해 다시 최저 기록을 썼다. 지구촌 곳곳은 유례없는 불볕더위와 홍수, 산불 같은 기상이변으로 시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기 대한민국은 기후위기를 모르는 듯 별세상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위층에 탔다고 안심하는 어리석은 승객이 바로 우리 인간이 아닌가 싶다. 남극과 북극에 몇 번 다녀와서 그런 걸까? 내 눈에는 남극 풍경보다, 그 사진을 무심하게 등지고 앉아 눈앞의 더위만 달래기 바쁜 우리 자화상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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