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들을 진료실로 초대합니다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를 받으러 오시는 분들이 처음으로 병원에 찾아오시는 날, 나는 그분들께 부모님 혹은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는지를 여쭤보곤 한다. 만 19세가 되면 이미 법적으로 성인이기에, 호르몬 치료를 받거나 성별 정정을 위한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20대 초중반의 경우 부모님과 경제적으로 아직 연결되어 있는 분들이 많고, 경제적으로 독립한 분들의 경우에도 원하지 않게 호르몬 치료를 중단해야 하는 가장 큰 사유가 ‘가족들의 반대’이다 보니, 치료를 시작하기에 앞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치료를 지속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쭤보는 것이다. 대부분은 “가족들은 잘 모른다” 정도로 답하시는데, 나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혹시라도 나중에 가족들과 호르몬 치료로 갈등이 생길 경우 병원에 꼭 모시고 오시라고.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재택의료센터 가정의학과 전문의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재택의료센터 가정의학과 전문의

어느 날 진짜로 한 트랜스남성분의 부모님이 찾아오셨다. 태어날 때는 여자로 법적 성별을 지정받았지만, 스스로 남자로 정체화하고 있는 분인데, 호르몬 치료를 받기 시작한 이후 목소리가 점점 굵어지고 피부의 피지와 여드름이 늘어 가족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한다. 그러던 중 딸에게서 느껴지는 체취가 달라졌다고 생각한 어머니의 비상한 눈치에, 호르몬 치료를 몰래 받고 있던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울며불며 결국 병원에까지 찾아오신 어머니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하셨고, 아버지는 화가 잔뜩 나 소리치셨다. “뭐, 이 따위 병원이 다 있어? 네가 의사야?”

진료실이 소란스러워져 데스크의 직원들이 긴장했으나, 진료실에서 나가실 때쯤에는 많이 진정되셨다. 사실 진료실에 찾아오시는 부모님들의 제일 큰 걱정은 ‘이상한 병원일까봐, 위험한 치료일까봐’이다. 트랜스젠더 호르몬 요법이라고 하니, 어디 병원 같지도 않은 음침한 곳에서 재사용하는지도 모를 오염된 주사기로 의사인지 아닌지도 모를 낯선 사람이 몰래 성분 모를 주사약을 주입하는 걸 상상하시는 것 같다. 마약이나 불법 약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곳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위험한 치료를 받다가 건강을 해칠까봐 걱정하시는 것이다. 정작 병원을 방문하면 그냥 보통의 병원에, 면허와 자격을 갖춘 의료인들이 있는 곳이라, 그것만으로도 안심을 하신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다른 환자들, 감기로 진료를 받으러 온 아이들의 존재가 평범한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진료실 안에서 내가 굉장한 설명을 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트랜스젠더 호르몬 요법이란 어떤 것인지, 앞으로의 진료는 어떻게 진행될지, 호르몬 투여에 따른 신체적인 변화들은 어떨지, 앞으로 건강검진은 어떻게 받아야 하고 건강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늘 하던 설명들이다. 늘 하던 설명의 평범함이 부모님을 누그러뜨린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가장 궁금해하시는 게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식 말고도 이런 사람 많아요? 네, 많아요. 정확한 인구조사는 해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10만명에서 20만명 이상 있는 것 같아요. 다들 뭐하고 살아요?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요. 의료인들도 많고요. 농부, 교사, 미용사, 그래픽디자이너, 프로그래머, 통·번역가, 공인중개사, 회사원, 자영업자 등 정말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요.

호르몬 투여로 인한 부작용은 어떤 것이 있는지도 설명한다. 이 설명에 외려 안심한다. 아무 부작용이 없는 치료인 것처럼 하는 게 아니라, 부작용을 정확히 설명하고 그것을 예방하거나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진료실에서 설명 한번 듣는다고 바로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서는 분들은 많지 않다. 그래도 나는 부모님을 진료실에 초대하는 이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에 진료실까지 찾아오시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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