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 소설가·번역가

처음 그것을 발견한 것은 가을 햇살 아래 펼쳐진 울타리콩들 사이에서였다. 단단하게 말라가는 빨강 하양 콩들 틈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무엇인가가 섞여 있었다. 생김새는 분명 콩인데 크기는 다른 것들의 세 배쯤 되어 보였다.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콩인가? 열매의 씨앗인가? 벌이나 나비가 다른 밭에서 묻혀온 꽃가루로 생긴 돌연변이인가?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봄이 되면 땅에 심어보는 것.

덩굴지고 올라가는 울타리콩 종류는 4월 말에 심는다. 나무 옆에 심으면 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옥수수 옆에 심으면 옥수수대를 타고 올라간다. 일찍 심어도 늦게까지 덩굴을 뻗으며 이파리가 승하다가, 왜 안 달리나 걱정할 때쯤에야 꼬투리가 달려서 나중에는 주렁주렁 늘어진다. 1)

갈무리해둔 울타리콩을 심을 즈음, 마당 한구석 대추나무 밑에 황금빛 씨앗을 따로 심었다. 며칠 안 있어 떡잎 두 장이 올라오더니, 일주일째에는 대추나무를 감고 올라간 덩굴의 끝이 가물가물했다. 나무 밑동을 감은 줄기는 동아줄처럼 튼실했으나, 심장 모양의 잎사귀는 콩잎이 분명했다. 이렇게 장대한 넝쿨이라니, 콩은 또 얼마나 많이 달릴 것인가. 세계 최고의 수확량, 세계 제일의 성장률을 기록할 기적의 콩 넝쿨! 방송을 탈 것이고 돈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가슴이 막 웅장해지려는데, 문득 이것이 정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콩인지, 콩이라면 이렇게 빨리 자랄 수 있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잘 키우셨네요.”

대문도 울타리도 없는 시골집 마당이지만, 들어오는 기척도 없이 어느결에 낯선 이가 곁에 서 있었다.

“저는 그저 심기만 했습니다만?”

“씨앗은 시작이자 또한 끝이잖아요. 땅속에 자리를 잡는 순간이 시작일 테지요. 헤롯 왕의 무덤 속에 있다가 최근에 발견된 대추야자 씨앗은 제자리를 잡아주자 싹을 틔우고 이파리를 냈답니다. 2천년 만에요.”

“오래 기다렸군요.”

“기다림은 사람의 일이에요. 씨앗은 그렇게 개별적이지 않아요. 거의 모든 것을 품고 있어도 뭘 바라거나 아우성치지 않는다고요. 씨앗을 감싸고 있는 것은 일종의 침묵이에요.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껍질이죠. 조건이 무르익었다는 신호를 받으면 안에 있는 배아가 몸을 펼치고 껍질은 부서집니다. 그게 시작이에요. 원래 되기로 정해진 것이 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마련이고요.” 2)

“저 콩 덩굴은 빨리 자라던데?”

“저 덩굴의 선조는 제초제에 내성을 지닌 유전자 변형 콩이었죠. 그 콩을 심고 제초제를 마구 살포하다가 잡초에도 내성이 생겼어요. 제초제를 이기는 더 강한 슈퍼 잡초가 태어난 거죠. 자연이란 그런 거잖아요? 죽지 않으면 더 강해지는 것. 하지만 제초제 회사들은 눈앞의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죠. 슈퍼 잡초를 제거할 더 강한 제초제를 만들어요. 베트남 전쟁 때 숲을 고사시킨 에이전트 오렌지의 주성분이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3) 그리고 또 뭘 하는지 알아요? 더 독한 제초제를 견딜 유전자 변형 작물을 다시 개발하는 거죠. 저 덩굴은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돌연변이예요. 마땅히 들여야 할 시간을 추월하다 보니, 한 줌의 빛, 한 방울의 물만 있어도 비집고 들어가 움켜쥐고 올라가는 괴물이 되었어요. 맨 위에 이를 때까지 꽃이 피지 않아요. 끝을 용납하지 않는 거죠.”

“당신은 누구세요?”

“씨앗을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구멍 난 생명의 그물망을 수선하려고요. 예전에는 실과 바늘, 가위를 가지고 씨앗의 유전자를 자르고 이어 붙이는 일을 했지요. 사람들은 저를 ‘콩 넝쿨의 잭’이라고 불렀어요. 아니요. 저는 거인의 금화를 훔치지 않았어요. 내가 만든 괴물을 없애러 돌아다니면서, 제초제 회사에서 받은 돈을 돌려주지 않았을 뿐이죠. 이제는 너무 늦은 거 같아요.”

1) <횡성에서 살아온 토종 씨앗들>, 오숙민, 한영미 2) <랩 걸>, 호프 자런 3) <희망의 씨앗>, 제인 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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