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가족과 시누이 페미니즘

박선화 한신대 교수

추석 무렵.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며느리들이 공동구매하자는 셔츠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세계 각국의 욕이 쓰인 듯한 디자인인데 그중 가장 크고 선명한 한국어 ‘씨발’ 때문이었다. 코로나19 이전엔 제사 회피용 가짜 깁스붕대 유머가 유행하더니 다시 명절 스트레스가 시작되었다. 언젠가부터 명절파업을 선언했다거나, 아예 시댁과 관계를 끊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제사음식 사진만 봐도 울렁증이 일어난다는 이들도 있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박선화 한신대 교수

세대차가 존재하는 고부갈등보다 기묘한 것은 시댁 또래 여성들과의 갈등이다. 시누이가 매년 친정에 와서 꼼짝 않고 놀다가, 본인의 시댁 제사에 쓸 음식으로 며느리인 자신이 만든 음식만 챙겨간다는 뉴스를 접했다. 남편에게 하소연했지만 소용이 없다는 호소에 댓글창이 폭발한다. 그런 집안의 남자가 달라질 리 없으니 이혼하라는 강성 의견이 지배적이다. 겨우 시댁 제사를 끝내고 친정에 갔는데, 시누이들 놀러오니 와서 같이 밥 먹자는 연락이 온다는 다른 이의 글도 보인다. 21세기에 “며느리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운운하는 시누이도 있다고 한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옛말이 아직 옛말이 아닌가 보다.

모를 일이다. 한 자녀가 대세가 되는 근미래는 양상이 달라지겠지만, 아직은 많은 이들이 누군가의 며느리인 동시에 시누이로 존재한다. 한 사람이 다른 역할을 수행하다 보면 자연스레 역지사지의 성찰이 이루어질 듯한데, 어째서 시누이일 때와 며느리일 때의 마음가짐이 그리 달라지는 것인지. 시댁의 폭력성에 분노하는 높은 인권의식을 가진 여성이 어떻게 같은 처지의 다른 여성에겐 그토록 내로남불의 양면성을 보일 수 있는 것인지.

누군가의 시누이로 살게 된 지 10년쯤 되었다. 서로에 익숙지 않았던 잠시의 어색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갈등이 없었다. 가족 구성원들의 인품이 특별히 훌륭하거나 한량없이 착한 성정이어서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 생활 속에 내재한 권력관계나 무감해진 인습, 여성의 지위에 대한 고민이 가져온 결과에 가깝다. 올케는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임신을 했다. 출산과 육아를 고려하여 몇 년간 명절이나 집안 제사는 내가 사는 집에서 내가 준비했다. 명절 전날 온 가족이 함께 장을 본 후 음식은 나와 엄마가 장만했고, 동생네는 명절날 즐겁게 제사를 지낸 후에 처갓집에 내려가 묵는 일정이 자연스레 정착되었다.

조상의 제사를 아들만 주관해야 하는 것도, 동시에 며느리는 일꾼으로만 존재하는 구조는 불합리하다고 느낀다. 딸도 자손이니 상황에 따라 주관하거나 함께하는 것이 의무이자 권리여야 하고, 직업과 생활방식 여부에 따라 아들이 제사음식 준비를 할 수도 있어야 한다. 모든 사회·집단의 갈등에는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불균형한 의무와 권리의 분배 문제가 존재하는데, 시댁 갈등 역시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몇년 전 동생과 함께 해외에 나간 올케는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명절이나 돌아가신 아버님 제사를 챙겨 사진이나 영상을 보내온다. 무조건 순종하는 세대도 성향도 아닌데, 그간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행하는 것이니 고마울 따름이다.

혈연이나 서류는 가족애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배타적이고 주관적인 충성도보다는, 모든 구성원에 대한 만민평등의 정신과 합리적이고 적절한 예의가 더 깊은 가족애의 충분조건이 아닐까 싶다.

사회 곳곳의 권위적이고 봉건적인 잔재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모습은 안타깝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어 시댁과 며느리의 갑을관계가 바뀌고 부모들이 자녀 눈치 보는 시대라는 말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가장 편안해야 할 가족들 사이에서조차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고 때로 연을 끊는 슬프고 아픈 현실은, 나부터 바꾸지 않으면 바뀌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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