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가리키는 곳

김택근 시인·작가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진솔하다. 문체도 담백하다. 가끔 발랄하지만 이내 단정하다. 그래서 비린내도 쉰내도 나지 않는다. 빨치산 출신 아버지가 죽고 딸이 상을 치르는 3일간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조문을 왔다. 그들과 얽히고설킨 인연은 무겁고 무섭다. 빨치산 아버지 때문에 집안이 몰락하고, 누구는 죽고 또 누구는 출세 길이 막혔다. 딸은 빨치산이란 족쇄를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작가는 그런 사연들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어떤 것은 발가벗기고 어떤 것은 기웠다. 내상(內傷)이 깊었지만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다. 천연덕스럽다. 가슴이 먹먹한데도 웃음이 나왔다.

김택근 시인·작가

김택근 시인·작가

‘위장 자수’를 했던 빨치산 아버지는 남의 일이라면 자다가도 뛰쳐나갔다. “오죽했으면 글것냐” “긍게 사람이제”를 달고 살았다. 사람을 좋아하고, 작은 것들을 사랑했다. 그럼에도 세상을 건너는 법은 서툴렀다. 목이 잘린, 내장을 쏟고 죽은 동지의 시신을 수습했던 전사였지만 밭일은 두 시간도 하지 못했다. 군인보다, 경찰보다, 미군보다 무서운 존재가 딸이었다. 딸의 질책에 아버지는 허둥거렸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던 혁명 전사들이 전국에서 스무 명 남짓 찾아왔다. 전투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세월 앞에 하나둘 스러져갔고, 아직 지상에 남은 이들이 떠난 동지를 추모했다. 서로를 다독이지만 현실은 비루하다. 지리산과 백아산은 변함없이 푸르지만 ‘산속의 사회주의’는 멀어져갔다. 혁명은 녹이 슬고 전사들은 쓸쓸하다.

소설은 우리 아버지도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네 집안은 빨치산들에게 짓밟혔다. 외지에 나와 있던 아버지는 살아남았다. 아버지는 살면서 일체의 유흥행위를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고향집에서 어머니 환갑잔치가 벌어졌다. 초겨울 잔치마당은 흥겨웠다. 먹고 마시고 떠들다가 마침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방에만 있었다. 초저녁 추위가 몰려오자 모닥불을 피웠다. 불길이 치솟고 흥이 타올랐다. 할머니 환갑에 맞춰 미국에서 건너온 손녀가 당시 유행하는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 춤을 추겠다고 벼르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무슨 짓들이야. 여기가 유곽인가.” 환갑잔치는 그걸로 끝이 났다. 마을 사람들은 흩어지고 그날의 주인공은 부엌에 주저앉아 눈물바람을 했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좀체 웃지도 않았다. 노래도 하지 않았다. 깊은 사연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보였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물을 수 없었다. 그러다 사촌형 상가에서 아버지 집안에 대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빨치산 토벌대원이었던 문상객이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싹시골 김부자집 손이고만. 그때 그렇게 큰 집이 불타버렸지.” 하지만 백아산 자락에서 일어난 싹시골의 비극을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생전에 멸문(滅門)의 참상을 자식들에게 얘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담배를 태우며 굽은 허리로 허공을 바라보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작품 속의 빨치산 문상객 중에는 김부자집을 불태운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빨치산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처럼 어딘가를 자주 응시했다고 한다. “불도 켜지 않은 베란다에서 하얀 담배연기를 어둠 속으로 피워 올리던 아버지의 여윈 등이 불쑥 떠올랐다.” 눈길이 멎은 곳에는 누가 있었을까. 아버지들은 어떤 세상을 원했을까. 처음에는 달랐겠지만 끝은 같았을 것이다. ‘애비들 세상은 험했지만 새끼들만은….’ 시절을 잘못 만난 사람들, 살아있음이 죄가 되었던 사람들.

빨치산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이런저런 사람들이 섞여있어도 ‘묘하게’ 평화로웠다. 이념은 한때 횃불이며 총구였지만 인간의 땅에서는 한 줌의 비료도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생각했겠지. 우리가 싸워야 할 곳은 산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불빛 아래 옹기종기 모여 밥 먹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싸우기도 하는 저 세상이라고.” 그렇게 산을 내려와 사람냄새를 풀풀 풍겼고 죽어서 빨치산도 빨갱이도 아닌 아버지로 돌아왔다.

아버지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누군가의 자식이다. 용케 살아남아 우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빨갱이라서 빨간 자식을 낳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산 자들은 이렇게 모여 있다. 비범한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가리키는 곳에는 인간이 있다. 눈물 나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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