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인 이웃의 한숨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매일 아침 스쿨버스 정류장에서 눈인사를 나누던 학부모가 이란 출신이라는 것을 최근 알게 됐다.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의 석연찮은 죽음이 촉발한 시위를 두고 그는 “2009년(녹색운동)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며 “미국 정부가 좀 더 나서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지난주 조지타운대에서 열린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강연에서도 이란계 미국인의 목소리를 접했다. 청중 질문 기회가 주어지자 순식간에 학생 십수 명이 마이크 앞에 줄을 섰다. 두번째 질문자로 나선 이란계 여학생은 “미국이 어떻게 이란 정권에 책임을 물을 계획인가”를 따져물었다. 조 바이든 정부는 과연 미국의 역할을 촉구하는 이란인들에 응답할까.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최근 한 팟캐스트에서 2009년 이란 시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에 대해 “실수였다”며 “자유를 향한 시민들의 갈망, 그로 인한 희망의 섬광 아니 희미한 불빛이라도 봤다면 (연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야 했다”고 말했다.

오바마의 뒤늦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일까.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일찌감치 이란 시민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재무부는 아미니를 체포한 도덕경찰, 시민 200여명을 숨지게 한 시위 진압 책임자들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이란 시위 한 달을 앞둔 지난 14일 국무부에선 장관은 이란의 여성·인권활동가들을, 부장관은 글로벌 테크 기업 임원들을 각각 만나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미국이 움직이면 이란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생길까. 미국식 민주주의·인권 모델을 해외에 ‘이식’하려던 역대 미 행정부의 시도는 거의 여지없이 실패했다. 그럼에도 미국 바깥에선 미국이 ‘보편적 규범’의 대변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한다. 미국은 그럴 만한 의지와 역량을 갖췄을까.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21개월 만에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에서 “미국보다 세계를 이끌기에 나은 위치에 있는 나라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최우선 목표로 내건 중국 견제 전략으로 ‘미국 내 투자’ ‘동맹과의 제휴’ 등을 제시했다. 동맹의 힘을 빌리고 중국식 산업정책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을 무릅쓰고 자국 첨단기술 역량 강화에 매달리는 것은, 결국 지금의 미국이 독자적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NSS는 1987년 이후 발표된 17건의 문서에는 없었던 미국 민주주의 위기에 관한 기술도 포함했다. 대내적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는 예전처럼 가치를 앞세워 전 세계에 힘을 투사할 수 없으리라는 인식의 반영이다. 남반구에서 중·러의 영향력이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는 상황 역시 미국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래도 결국엔 정권이 국민을 이기지 못한다. 한국의 민주화 경험이 이를 말해준다.” 시위 진압에 나선 이란 당국이 10대까지 무차별 총살했다며 침울해하는 이란인 이웃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게 전부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그는 중국이 이란 정권과 혁명수비대를 막후에서 지원하는 한 이란 시민의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한숨지었다. 새삼스레 “권위주의 통치와 수정주의 외교정책을 결합한 강대국” 중·러와의 대결을 천명한 미국이 곱씹어야 할 대목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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