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데자뷔, 영국 트러스 내각

영국 정치가 수상하다. 지난 20일 리즈 트러스 총리가 취임 44일 만에 사임하고 25일 리시 수낵 신임 총리가 취임했다. 수낵 총리는 인도계 이주민 3세로 영국 역사상 최초의 비백인 출신 총리라는 점에서 주목받는 대상이 됐다. 트러스 전 총리도 영국 역사상 최초의 40대 여성 총리로서 30대 중반부터 12년에 걸쳐 환경장관, 재무차관, 교육장관, 국제통상장관, 법무장관, 외무장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커다란 관심을 받았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그러나 트러스 전 총리는 영국 역사상 최단기 총리에다 정책 실패로 인한 사임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2016년 브렉시트 문제로 물러난 캐머런 총리 이후 6년 동안 다섯 번째 총리 교체가 이어져 ‘총리 재임 기간이 양상추 유통기한보다 짧다’는 농담을 현실화한 인물로 거론되기도 한다.

사임의 원인은 어설픈 감세 조치에 따른 재정 정책 실패였다. 지난달 23일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하며 지출 규모 축소 등 재정 보완 정책을 제시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영국도 재정 상황이 심각해졌을 뿐 아니라 9월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10.1%에 달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도 영국 경제 성장률을 0.3%로 잡아 지난 4월 전망치 1.2%보다 크게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트러스 전 총리의 해법은 소득세 최고세율 인하와 법인세 인상 철회를 중심으로 2027년까지 450억파운드(약 73조1484억원)에 이르는 대책 없는 감세 정책이었다. 재무차관과 국제통상장관 등 경제 관련 요직을 거친 총리답지 않은 대처였다. 과잉 신념이라고 할까. 부자와 기업의 이익 증대를 통해 경제 전체가 성장한다는 자유주의 낙수 이론을 충실히 따른 정책이었다.

결국 파운드 가치가 달러 가치와 동등한 수준까지 하락하고 국채 가격도 폭락했다. 영국중앙은행도 긴축과 반대되는 양적 완화를 선언해 시장 혼란을 부추기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악화했다. 트러스 전 총리는 뒤늦게 부자 감세안을 철회하고 재무장관을 경질했지만, 여론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보수당 내에서도 사퇴 압력이 거세졌고, 물러나지 않겠다던 그는 사실상 강제 사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트러스 전 총리의 조기 퇴진이 재정 정책 실패에만 기인하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자유시장주의 이념에 ‘죽음의 키스’를 남겼다고 하면서 어설픈 자유주의 정책으로 우파의 이상을 실추시켰다고 지적한다. 수낵 신임 총리는 경선 당시 법인세 6%포인트 인상, 국민보험(NI) 분담금 1.25%포인트 인상, 친환경 에너지세 부과 등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트러스 전 총리와 달리 재정 마련 대책을 갖춘 것이다. 그럼에도 수낵은 트러스(57%)에 비해 14%나 적은 43% 지지율에 머물러야 했다.

트러스 전 총리의 실패는 어쩌면 경선 과정에서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 보수당이 ‘제2의 대처’를 꿈꾸는 그에게 기대한 것은 복지 예산을 줄이는 등 더욱 강력한 긴축 정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낵 당시 후보의 재정 정책이 긴축에 머물지 않고 조세 인상 등을 통해 기업에도 부담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남긴 상처는 영국에도 매우 크다. 특히 대처 총리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사회 복지가 축소된 상태에서 저소득층 국민이 겪은 고통은 더욱 커서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트러스 전 총리가 대처처럼 강력한 긴축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인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 더 이상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보수당은 수낵에게 기대를 돌렸다. 그러나 수낵 총리에게도 그에 대한 대책은 없다. 보수당이 차선으로 선택한 것도 저소득층의 피해 복구보다 국민보험금 분담금 인상 등 오히려 부담을 가중시키는 정책이다.

이달 초에 이미 보수당 지지율은 22%에 불과해 노동당보다 30%포인트나 낮았다. 이것을 과연 트러스 전 총리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현 보수당 정부를 출범시킨 총선은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되기 전인 2019년 12월에 치러졌다. 보수당이 조기 총선을 거부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된다.

기회 있을 때마다 자유를 외치며 규제를 없애려는 윤석열 정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우리 정부의 정책은 경제적 자유에 한정될 뿐 정치 사회적 자유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어 더욱 우려스럽다. 한국은 영국에 비해 복지 예산이나 사회안전망이 크게 부족한 상태여서 긴축 정책의 여지도 적지만 그 폐해가 훨씬 심각할 수밖에 없다. 트러스 내각의 붕괴는 윤석열 정부의 데자뷔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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