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하는 시간

천계영의 만화책 오디션을 읽었을 때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드러머가 방에 누워 시곗바늘 소리와 자신의 심장소리, 여러 소리들을 들으면서 시간을 쪼개고 박자를 쪼개던 장면. 그가 가장 좋아하던 소리는 자신이 엄마를 껴안을 때 두 심장이 마주하여 만들어지는 불규칙한 리듬이라고 했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나는 누군가에게 청진기를 가져다 대려고 할 때마다 이 장면이 떠오른다. 나도 이렇게 심장소리, 공기가 기관지를 통과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청진을 할 때 눈을 종종 감곤 한다. 하나의 감각을 차단하면 다른 감각이 좀 더 예민해지는 느낌이 들어, 소리에 좀 더 집중하고 싶을 때 눈을 감는다. 너무 피곤할 때는 청진을 핑계로 살짝 눈을 감고 피로를 달래보기도 한다. 눈을 감고 심장소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 두근거리는 심장이 내게 다가오는 듯한 그 느낌이 좋다.

이렇게 심장소리에 집중하고 있으면 또 떠오르는 얘기가 있다. 예전 연수강좌에서 들었던 아이의 이야기이다. 아이는 심장에 구멍(심방중격결손, 심장에 있는 2개의 심방 사이가 선천적으로 막히지 않은 채 출생)이 있었다. 예닐곱 살이 될 때까지 심장에 구멍이 있는 줄 모르고 컸다. 유난히 면역이 약해 감기만 걸려도 폐렴이 되어 입원하기가 일쑤라 병원 문턱을 수시로 드나들었지만, 그렇게 많이 병원에 다녔는데도 심장 구멍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결국 면역력이 약해 아이가 수시로 폐렴에 걸렸던 이유가 심장의 구멍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난 후, 아이의 보호자들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수많은 병원의 의사들이 이 큰 구멍을 못 찾아냈느냐고. 원래 큰 구멍이 더 찾기가 힘들다. 심장 구멍을 청진을 통해 들으려면 혈액의 물살이 만들어내는 잡음을 들어야 하는데, 구멍이 작을 때 오히려 잡음이 더 크게 들리곤 한다. 구멍이 크면 물소리가 더 많이 날 거 같지만, 꼭 그렇지가 않다. 계곡물은 와르르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큰 강물은 유유히 소리 없이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구멍이 커지면 오히려 심장의 잡음이 줄어들기도 한다.

큰 문제가 발견되지 않고 지나가는 일은 많다. 심장 소리만이 아니라 초음파 같은 검사에서도 그렇다. 동료 의사가 최근에 70대 남성분의 췌장암을 진단해드린 일이 있었다. 소화불량이 최근에 심해져 상복부초음파를 했는데, 췌장에서 1㎝ 정도 크기의 종괴가 발견되어 복부 CT를 찍으시도록 했더니 그 종괴는 췌장암이 맞았고, 암이 온통 간까지 전이되어 있었던 상태였다. 초음파만 보았을 때는 간에 전이가 진행되어 있는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워낙 지방간이 심하기도 했던 터라, 이미 간 전이가 있다는 복부 CT 검사 결과를 모두 들은 상태에서 나는 초음파 사진을 다시 확인해봤지만 긴가민가 싶을 정도였다. 전이가 부분적으로 있었다면 오히려 드러났을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전이가 진행되어 있으니,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전이로 인해 이런 건지 구별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간을 모두 잠식해 들어가 정상 조직과 암 조직이 구별조차 되지 않은 상태여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환자분들은 암이니까 초음파에서 엄청 잘 보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암은 오히려 경계도 흐릿하고 색깔도 흐릿한 경우가 많다. 가장 악성과는 거리가 먼, 단순 낭종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물혹은 경계도 아주 뚜렷하고 색깔도 아주 진해서 다른 조직과도 분명하게 구별이 된다. 아무런 문제가 아닌데도, 정말 잘 보이고 눈에 띈다.

그러니 잘 보인다고, 잘 들린다고 큰 문제인 건 아니다. 드러나 있다고 해서 문제의 원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 보이고 잘 들리는 와중에 숨어 있는 진짜 큰 문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더 이상 두근거리지 못하게 된 심장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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