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압색 정부’

김민아 논설실장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입구 표지판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권도현 기자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입구 표지판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권도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5일 서울 한남동 관저로 국민의힘 지도부를 초청해 만찬을 했다. 저녁 6시50분 시작된 자리는 3시간20분간 이어졌다. 그러나 풀(pool·대표) 취재가 허용되지 않았고, 대통령실에서 촬영한 ‘전속’ 사진을 배포하겠다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대통령실은 만찬 도중 ‘사진 공개는 없을 것’이라고 공지했다. 현직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가 만찬을 하고도 사진 한 장 보도되지 않은 것은 민주화 이후 처음일 터다.

김민아 논설실장

김민아 논설실장

단순한 해프닝으로 볼 수 없다. 대통령의 언론관 문제로 좁힐 일도 아니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강력한 권한과 권력을 합법적으로 누리는 대신,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진다. 여기에는 헌법과 법률이 명시적으로 규정한 부분은 물론, 수십년간 대통령제를 유지하며 수립되고 지켜져온 관행도 포함된다. 대통령의 공적·공식 행사에 언론 취재가 허용되며, 언론이 취재하지 못한 부분은 사후 충실하게 브리핑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윤 대통령은 국민과 맺은 신사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있다. 최근 동남아시아 순방에서 한·미, 한·일 정상회담에 풀 취재를 불허하고, 김건희 여사 일정도 ‘전속’만 동행한 채 진행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대통령과 집권당 지도부가 대통령 관저에서 만찬을 하는 행사는 비공개일 수 없고 비공개여서도 안 된다. 참석자, 장소, 준비 인력·비용 모두 ‘공적(公的)’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사의 비공개를 묵인한다면, 윤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몰래 만나는 일도 ‘뉴 노멀’이 될 수 있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은 ‘내로남불’을 넘어 ‘내맘대로’에 가깝다. 대통령 전용기는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며 동행취재 비용은 각 언론사가 부담하는데, 특정 언론사만 안 태운다. 내맘대로다. 전용기 내에선 가까운 기자들만 불러 ‘개인적’ 대화를 나눈다. 내맘대로다.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을 업적으로 자랑하더니 갑자기 중단한다. 내맘대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태도다. 지난 23일 기자회견을 연 유족들의 6개 요구사항 중 첫 번째는 대통령과 정부의 진정한 사과였다. 윤 대통령은 그러나 “이미 사과했다”고 버틴다. 내맘대로다. 유족은 물론 시민 여론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경질을 촉구하는데, 윤 대통령은 감싸기에 바쁘다. 고교·대학 후배이니 내맘대로 하겠다는 거다. 대통령은 공복(公僕·public servant) 중의 공복이다. 공공성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요구된다. 모든 언행의 기준은 내맘이 아니라 주권자의 마음이어야 한다.

세간에 우스갯소리가 돈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정부,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로 명명됐는데 윤석열 정부는 ‘압색(압수수색) 정부’로 불릴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 질병관리청 압수수색에 나설 거라는 내용이다. 농담 속에 뼈가 있다. 윤석열 정부는 왜 수사와 압수수색에 매달리나. 왜 야당 의원의 의혹 제기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대신 고발하나. 왜 화물연대가 국토교통부와 교섭에 나선 날, 업무개시명령을 예고하나. 윤 대통령이 뼛속까지 검사여서라고들 한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다른 요인은 없을까.

뒤집어보면 취약성의 징후일 수 있다. 윤 대통령에겐 이슈를 직면하고 카운터파트와 논쟁해 의사를 관철할 자신감이 보이지 않는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겨냥한 ‘내부 총질’ 문자 논란 당시 대통령은 열흘 넘게 출근길 문답을 피했다. 주요 20개국(G20) 만찬장에서 김건희 여사가 ‘다른 정상들과 어울리라’는 듯한 손짓을 했지만, 대통령은 곧바로 일어서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야당과 논리 싸움을 벌이거나, 언론의 불편한 질문에 답하거나, 파업 노동자들과 협상해 설복시킬 배짱이 없다. 그러니 수사와 압수수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용기에 못 타는 기자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국민의힘 지도부 만찬에서 윤 대통령은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를 거론하며 농담했다고 한다. “월드컵에서 우리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만나면 어떻게 하나? 져줄 수도 없고….” 윤 대통령은 뭐든 내맘대로 할 수 있다는 ‘미스터 에브리싱’이 부러운가. 대통령은 신민(臣民) 위에 군림하는 군주가 아니다. 시민이 일정 기간 심부름시키려고 뽑은 대리인일 뿐이다. 모 대부업체 광고처럼 “어쩌라고? 내맘이지!”만 외치는 대통령은 위험하다. 제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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