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2)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칼럼] 전쟁과 평화(2)

2018년 1월에 썼던 칼럼의 제목도 ‘전쟁과 평화’였다. 우리 눈앞에서 지금 전개되는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위기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게 보여서 지난 5년간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복기하면서 새해를 맞는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2017년 1월 백악관에 입성한 트럼프는 그해 9월, 그의 첫 유엔총회의 연설에서 미국과 그의 동맹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길밖에 없다는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은 계획대로 6차 핵실험을 강행하고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야말로 강 대 강 대결 속에서 한 치를 바라볼 수 없었던 긴박한 정세였다.

그럼에도 8년 동안이나 ‘전략적인 인내’를 내세우면서 기존의 대북정책에 묶였던 전임자 오바마보다는 좌충우돌하는 트럼프가 오히려 어떤 돌파구를 만들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도 사실 있었다. 위기는 동시에 기회일 수 있다는 말처럼 이 같은 북·미 간의 험악한 상황에 반전의 기회는 왔다. 그러나 두 적대자가 직접 만난다는 일은 쉽지 않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일종의 촉매제로서 제삼자가 필요했다. 바로 이 역할을 문재인 정부가 맡았고 마침 평창 동계올림픽은 이의 성사를 위해서 좋은 배경도 마련해 주었다. 2018년 4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초기에 혼선은 있었지만 6월에는 싱가포르에서 첫 번째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역사적인 만남을 CNN의 중계를 통해 지켜보면서 나는 괴테의 말년기 소설 <친화력>을 떠올렸다. 남녀 간의 애증 관계를 속성이 서로 다른 원자나 화합물 사이에 생기는 친화력에 비유한 이 소설은 선택이나 우연으로 등장하는 제삼자는 항상 새로운 상황을 만든다는 것을 주제로 삼았다. 이 소설의 결말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문재인 정부를 매개로 시작된 북·미 정상회담이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안착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합의를 하지 못한 첫 번째 싱가포르 정상회담에 이은 2019년 2월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열린 두 번째 회담의 결과는 이런 희망에 마침표를 찍었고 문재인 정부의 중재 역할도 끝났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수립에 많은 기대와 희망을 걸게 만들었던 일련의 극적인 변화가 불과 1년여 만에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었던가.

신냉전 최악 시나리오는 ‘대리전’

두 차례에 걸친 북·미 정상회담이 이렇게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당시 미국의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었던 존 볼턴이 끈질기게 제기한 ‘리비아식’의 북핵문제 해결방식이 보여준 것처럼) 협상목표의 설정에 양쪽의 견해차가 너무 컸고 최소합의에 대한 실무차원에서 준비도 역시 부족한 데 있었다.

물론 대화나 협상에 참여한 쌍방이 애초에 적대정책의 완전 종식과 불가역적인 비핵화에 대한 기대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두 차례나 자리를 같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방이 상대방의 경험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서로가 관점의 차이를 관찰할 수는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해준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해주겠다’는 약속과 이에 따른 행동이 보장되어야 새로운 관계체계가 성립될 수 있었는데 거기까지 가기에는 상호신뢰가 여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점만을 확인하고 헤어졌다.

이를 기점으로 남북 간의 정치적 기류도 걷잡을 수 없게 악화 일로를 걸었다. 2020년 6월 ‘남북공동 연락사무소’ 폭파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대북전단의 살포를 못 막고, 2018년 말에 가동한 ‘한·미워킹그룹’ 때문에 미국의 대북제재 울타리를 더 벗어날 수 없어 개성공단의 재가동도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또 국방예산마저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 때보다 더 늘어나자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선순환으로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를 북이 사실상 접었음을 의미했다.

중매 선다는 일이 어려우므로 아주 신중하게 나설 일이라는 뜻에서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석 잔이고, 못하면 뺨이 세 대’라는 속담도 있다. 북·미 정상을 회담장까지는 인도할 수 있었던 ‘중매쟁이’가 자신을 ‘운전자’라고 여겼다고 쌍방으로부터 조롱과 질책이 섞인 반응조차 나왔다.

정상적인 상황에서조차 이처럼 힘들었는데 2020년 초부터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 사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어려워진 조건에서 남북관계도 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된 미·중의 무역전쟁은 세계경제활동에서 중국을 분리하는 ‘포괄적인 탈동조화(脫同調化)’를 추구했는데, 바이든의 대중국 정책은 (국무장관 블링컨이 언급한 것처럼) 경쟁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할 수 있으면 서로 협력하고, 필요하다면 적대적인 정책도 펼 수 있다는, 보다 유연성을 표방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지난해 10월에 열렸던 20차 공산당대회를 통해 시진핑의 3차 연임을 확정한 중국은 국내와 국제의 경제순환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이른바 ‘쌍순환(雙循環)을 내걸었다. 내수확대와 과학기술발전을 방편으로 해서 미국과의 경제전쟁에 대응하겠다는 뜻이었다. 또 경제력과 군사력을 배경 삼은 중국이 내놓은 대만과의 조국통일이라는 정책은 미국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라는 것도 보여주었다. 중국을 포위하기 위한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이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안보동맹인 ‘오커스’(AUKUS)를 출범시킨 데 이어 트럼프 때 창설된, 미국·인도·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이 함께 참여한 ‘쿼드’(QUAD)의 위상도 격상시켜 과학기술의 협력을 통해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것 곱씹길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부패와 인권문제까지도 포함한 미국과 일본이 주동이 된 ‘인도-태평양전략’으로 중국을 조이는 촘촘한 포위망에 윤석열 정부도 적극적인 참여를 표명했다. 작년 11월11일에 프놈펜에서 발표한 한국판 ‘인도-태평양전략’은 이름까지도 같았다. 사드배치를 둘러싼 논란이 보여준 것처럼 중국과 미국 사이의 군사적 갈등에 남한이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문제는 최대교역국이 중국이기에 이에 대한 답은 사실 쉽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미·중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표방하면서 모호함을 유지했으나 이제는 이를 폐기하고 중국포위망의 일원이 될 것을 선언한 셈이다.

나아가 작년 6월에는 기시다 일본총리와 함께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앞서 언급된 프놈펜 성명에서 러시아의 강압과 위협을 규탄하는 내용에도 동의했다. 미·일·남한의 삼각구도와 중·러·북한의 삼각구도 간의 대치상황을 ‘가치외교’라는 이름으로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이른바 ‘신냉전’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국제환경에 적극 적응하겠다는 것을 밝혔지만, 신냉전이 장기화하면 할수록 이 두 삼각구도 안에 갇혀 있는 남북한의 자율적인 공간은 더욱 더 좁아지기 마련이다. 이의 최악 시나리오가 바로 ‘대리전’이다.

냉전 시기의 최초의 열전이었던 한국전쟁이 휴전상태로 들어간 지 올해로 꼭 70년이 되지만 종전은 아직도 먼 이야기로 남아 있다. 또 한국전쟁이 냉전기의 대표적인 대리전의 하나였다는 사실마저 부인하는 분위기도 생겼다.

2017년 가을, 북·미 간의 군사적 긴장이 급격히 높아간 시점에서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전쟁을 강대국들의 대리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대리전이라는 표현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질서 안에 내재하는 냉혹한 힘의 관계를 표현하는 국제정치학의 용어다.

세밑을 지나 새해를 맞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북·미는 물론, 남북 간에도 이를 완화하려는 기미는 현재 보이지 않고 오로지 강 대 강의 메시지만 오간다. 또 한 번의 대리전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핵 참화로 번지는 상황인데도 보복과 응징하자는 소리만 크게 들린다.

핵무기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 옛날,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가장 부당하다고 여기는 평화도 가장 정당하다고 여기는 전쟁보다는 훨씬 낫다는 말을 남겼다.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는 새해에 우리 모두 꼭 곱씹어 보아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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